• [이은혜의 마음 읽기] 책 도구화의 어제와 오늘

    [일러스트=김지윤] 시간은 모든 걸 변화시키고 타락시킨다. 고귀하게 태어난 책은 한때 사회 변혁과 시대 추동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범속하고 타락한 매체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책 만드는 이들에게 우울감을 안겨준다. 편집자들이 익명성 속에서도 자부심이나 소명의식을 잃지 않는 것은 오로지 책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고귀함 때문이다. 그것이 교환가치가 현격히 떨어지는 책에 수십 년을 바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은 이념보다는 관습과 버릇이, 촘촘한 사유보다는 활동과 취향이 더 활발히 지배하는 곳이다.     ■  「 회고록 출판 집착한 아이히만 책이 총칼보다 무서울 수 있어 짜깁기 수준 책이 인문서 대접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혼란감 」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일에 가담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책을 타락시킨 것으로도 이름이 거론될 만한 인물이다. 독일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   전쟁이 끝난 후 아이히만은 연합국의 눈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가명을 쓰고 과거를 지운 채 그는 그림자처럼 조용한 마을에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삼림 감시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엔 닭을 키우는 양계장 운영자가 되었다. 이웃들은 그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과거와 단절한 채 소박한 마음씨로 살았다면, 그는 여가 시간에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인생 후반부를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길하게도 그에게는 글쓰기 욕구가 있었다. 나치 친위대원 시절 활발하게 추진했던 유대인 절멸 업무와는 너무나 다른, 철저히 주변부로 밀려난 자신의 익명성을 그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때 공허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손쉬운 방편은 자신에 대해 직접 말하고,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다시 과거를 호출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친나치적인 인물들과 접촉했고, 그중 빌럼 사선이란 인물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사선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잡지 발행인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고 새로운 문체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독자를 사로잡을 줄 아는 그에게 기대어 아이히만은 자신도 저자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엿봤다. 1950년대에 아이히만은 주말마다 사선 그룹과 교유하며 전쟁 기간에 자신이 했던 일을 녹음했고, 이 파일들을 문서로도 정리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을 때도 아이히만은 필기도구를 요청해 끊임없이 글을 썼다. 악필로 써내려간 그 원고지들을 연결하면 총 250㎞에 달한다고 한다.   회고록 출판에 대해 아이히만이 얼마나 열렬한 욕망을 품었는지 살펴보자. “장정과 표지는 진줏빛 혹은 비둘기색 같은 단색으로 할 것. 제목은 가늘면서도 아름다운 글씨체로 맞출 것. 가명은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생각이 없음.” 그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표지 색깔, 편집, 서체, 본문 구성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흥분 상태를 이어갔다. 그는 자기 정당화의 욕구를 넘어 스스로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자문했던 한 유대인 사상가의 말처럼, 누가 봐도 악일 뿐인 일에 대해서 아이히만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었다. 이렇듯 그는 후대의 해석권을 자신이 선점하려는 마지막 욕망을 품었다. 이런 그의 행적을 처음 알게 됐을 때 나는 책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좋은 매체’라는 기존의 내 생각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히만에게 책은 칼과 총 이상의 날카로운 무기였던 것이다.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책도 본질적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아이히만은 책의 매체적 성격에 충실했다. 그래서 악서(惡書)가 탄생한다. 유명세에 힘입어 혹은 시대적 조류 속에서 나쁜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책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이히만류의 책의 수단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다른 의미에서 수단화한다. 그것은 책이라는 매체가 힘겹게 보존하고 있는 어떤 아우라에 기대어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인문서 트렌드를 짚어달라는 외부 매체의 요청을 받으면 당혹스럽다. 트렌드란 주도적 흐름을 뜻하기에 베스트셀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인문서 베스트 목록에서 읽어본 책, 아는 저자 혹은 맥락이 잡히는 책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체 출판 지형도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정도라면 별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짜깁기 어록류에 불과한 책들이 인문학이라며 베스트셀러 목록을 일 년 내내 지배하면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온다. 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왜 출판을 하느냐는 질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출판인들은 점점 자극적으로 편집한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마케팅 중독, 긍정 중독, 리더십 중독 같은 것을 발견하면서 미열 같은 두통이 생긴다. 사람을 만나 어떤 책이 좋고 나쁘다는 가치 평가를 하기가 너무나 조심스러우며, 극도로 입조심을 하게 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4.04.25 00:18

  • [마음 읽기]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살기를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봄이 간다는데, 좀 걸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홀로 길을 나섰다. 하염없이 세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다리를 천근의 무게로 굳어지게 하였다. 일도 산책도 역시 쉼이 곁들여져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오늘은 아침 일찍 벌초(삭발)를 했다. 날이 더워 무명초(머리카락)가 조금만 올라와도 머릿속이 근질근질하다. 나른한 봄날에 벌초를 하고 나면, 개운하고 얼굴도 맑아지는 것 같아 좋다. 말쑥해진 모습으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어느덧 야금야금 세월이 긁고 간 흔적들이 보인다. 세월이란 게 되돌릴 수도 없고, 빨리 가게 채근할 수도 없다. 시간이 아깝다고 모아둘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주어진 오늘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  「 개인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 한 사람 배려·분노 전체로 파급 위정자는 모두 위한 길 고뇌해야 」    마음 읽기 『무문관(無門關)』에 이를 대변할 멋진 글들이 있다. ‘봄에는 백화만발하고 가을에는 달빛 밝으며/ 여름에는 바람 시원하고 겨울에는 흰 눈 내리네/ 쓸데없는 일에 마음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인생의 좋은 시절이라네(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또 이런 고측(古則)도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종심(趙州從諗)선사가 그의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에게 “무엇이 도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의 답변이다. “평상심이 곧 도이니라(平常心是道)” 하셨다. 평상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도인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구하는 도(道)는 내가 머문 자리에서 결코 멀리 있지 않다.   20대 때만 해도 ‘평상심이 도’라는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특별한 일, 열정적인 도전을 해야만 멋지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밥 먹고 잠자는 일이 뭐 그리 대수냐 싶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일상을 벗어나 찾아 헤매던 깨달음이 파랑새처럼 내 일상생활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 제목처럼,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멋진 삶임을 깨닫게 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도 안정되어야 한다. 며칠 전 내방한 여성 신도는 휴대전화에 남편은 부처님으로, 아들과 며느리는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입력해 놓았다고 했다. 남편을 부처님처럼 모시겠다는 뜻이다. 가족 모두를 불보살로 대하면 화낼 일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 참 기발한 방편이구나 싶었다.   『화엄경』을 공부하면, 부처는 꼭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는 인간 붓다를 넘어 모든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다. 모든 존재가 부처이며, 온 세상이 부처임을 가르쳐준다. 작은 세포 하나도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우주 전체도 부처로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화엄사상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나뉘지 않고, 이미 깨달은 부처와 아직 깨닫지 못한 미래의 부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가족을 불보살로 생각하는 저 신도의 마음이 맥락 없이 과장된 것은 아니란 얘기다.   우리 사회의 모습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각각의 개인이 모여 구성된 다수의 유기적 공동체가 우리 사회를 이루니 말이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와 낱낱이 이어져 있다. 한 사회에서 전체의 삶은 개인의 삶에 여러 가지 규정으로 영향을 끼치고, 개인의 삶은 가정, 직장, 국가 등과 연결되어 크고 작은 사회를 이룬다. 『화엄경』에서는 이것을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전체가 곧 하나’ 라고 표현한다.   이대로 보면, 한 사람의 문제라도 사회 전체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분노가 쌓여 주위를 어지럽게 만들며, 반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배려가 주위를 향기롭게 바꿀 수도 있다. 결국 나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주위 존재들을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인간을 두고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지만, 실상 오장육부를 가진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살펴보니, 얼마 전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새로 뽑혔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출가자인지라 신문도 정치면은 건너뛰고 읽는 편이지만, 적어도 나라와 지역 발전에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 당선되기 바라는 마음은 여느 국민과 다르지 않다. 위정자들에게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유연함과 굳건함을 지혜롭게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하며 앞날을 모색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상심 유지를 바탕으로 진정성을 더하여 모두를 위하는 길을 고뇌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

    2024.04.24 00:14

  • [삶의 향기] 오늘은 맞고 내일은 틀리다

    황주리 화가 카카오 택시를 탔다. 타자마자 기사님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더니 말문을 여신다. “대파값 아는 남편 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이쯤 되면 무슨 말이 나올지 알만 하다. “아니 운영이 어려운 동네 편의점을 일으키는데도 이삼 년은 걸리는데 하물며 나라는 어떻겠습니까?” 내가 웃으며 말한다. “기사님 제가 어느 편인 줄 알고 이런 말씀 하세요?” 하니까 “답답해서 그럽니다. 온 국민이 이십 오만원 받아서 형편이 나아질 것 같습니까? 이거 국민을 상대로 한 뇌물이에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민심도 실망스러워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직한 소통 불능과 입만 열면 거짓말 중에서 거짓말이 이긴 겁니다.” 문득 택시 속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듣는 게 피곤해서 묵묵부답하니 기사님이 또 말씀하신다. “아침에 어떤 분은 제가 이런 말을 하니 내려달래서 내려드렸어요.”     ■  「 정치성향 다르면 외계인 대하듯 어떻게 옳다 그르다 확신 가질까 내로남불·부정부패 사라지기를 」    그림=황주리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지인들 역시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친했던 사람들이 정치 성향이 다르면 서로 외계인 대하듯 하기 일쑤다. 잘못 하면 마음도 멀어진다.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해도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다. 늘 선거 때마다 잠을 설쳤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길에서 스쳐 지나간 그 누구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는 그런 쓸쓸한 느낌. 누구나 느껴 본 적 있을 것이다. 선거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가면 그때 그 시절 내가 옳았던 건지 분별이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문득 이런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아니 반대였나?   아마 영화 속에는 상반된 두 가지 버전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처럼 인간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한 제목을 본 적이 없다. 내 가까운 친구나 내 가족이 어떤 사람인지 심지어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판에 생판 만난 적도 없는 정치인을 옳다 그르다 어떻게 확신을 가질 것인가? 모든 판단은 시간이 걸린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말 일들 투성이리라.   어쩌면 믿음 가는 사람은 대의를 위해 미움받을 용기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끔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친북 성향이 강한 분들은 북한으로 나머지는 따로따로 생각이 같은 분들끼리 모여 싸우지 않고 살면 좋지 않을까? 또 거기서도 자기네끼리 피 터지게 싸울지 모른다. 세상에는 지금 내 편이라도 어리석은 자가 있기 마련이고 지금 내 편이 아니라도 지혜로운 자가 있기 마련이다. 지혜로운 정치, 지혜로운 국민, 지혜로운 나라, 상상만 해도 설레는 이름이다. 늦은 시간이라 또 택시를 탔다. 그 날 따라 말을 많이 하는 기사님을 만났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가진 기사님이다. 이번에도 그냥 듣고만 있었다. 나는 가끔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그저 우리가 두 개의 다른 나라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거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나당연합군의 힘으로 통일한 게 잘못된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 오래된 뿌리 깊은 감정이 대를 이어 계속 내려오는 건 아닐까?   오늘의 세태를 누군가는 검찰 독재라 하고 누군가는 국회 독재라 한다. 2024년에도 독재라는 진부한 낱말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이렇게 공들여 쌓아온 우리들의 눈물 나는 민주주의를 응원한다. 오래전 언젠가 브루나이 공화국에 가본 적 있다. 석유 부자 나라인 브루나이는 정월 초하루가 되면 전 국민에게 국왕이 세뱃돈을 준다. 우리도 그렇게 석유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우리에게는 석유보다 값진 지혜가 있으면 좋겠다.   1987년 처음 뉴욕에 갔을 때 라디오를 좋아하는 나는 메이드 인 코리아 라디오를 샀다. 누구나 메이드 인 재팬, 소니를 사던 시절이었다. 24시간 열려있는 한국 식료품점에 가면 없는 것이 없었지만 김치를 차이니즈 김치라고 써 붙여 팔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사는 한국인들은 그럼에도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이제 세계 어디를 가나 메이드 인 코리아가 인기 절정인 꿈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   부정부패가 완전히 사라져 그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라, 권력을 가진 사람부터 솔선수범하는 나라,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시침 떼지 않고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의 나라. 내로남불 하지 않는 사람들의 나라.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이 권력과 명예와 대접받음의 상징이 아니며 국민의 혈세로 주는 비싼 월급보다 자발적인 애국심으로 일하는 꿈같은 나라, 그런 곳이야말로 진정 진보되고 진화된 아름다운 우리나라일 것이다.   황주리 화가     

    2024.04.23 00:32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정원과 석류 화분

    문태준 시인 제주에는 신록의 연둣빛이 눈부시다. 산빛은 해가 뜨는 아침에도 산뜻하고 잔양(殘陽)에도 그러하다. 수풀은 어떻게 이처럼 신선한 색채로 스스로를 곱게 꾸밀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새잎을 보고 있으면 내게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꿈틀거리고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주 출신의 문충성 시인이 시 ‘제주의 새봄’에서 “연둣빛 새봄이 와요 새봄이/ 잎 떨린 나뭇가지마다/ 물새들 물고 온 새 소식들 투욱 툭 전하면/ 소리 없이 연둣빛 웃음들 터뜨려요/ 그 웃음소리/ 바닷가에서/ 들판으로 들판에서/ 산으로 오롯 오롯/ 퍼져나가죠 연둣빛 그 웃음소리”라고 흥겹게 노래한 바로 그 신록의 세상이다.     ■  「 새봄 신록에 연둣빛 웃음소리 누구나 부지런해지는 계절 시간과 정성이 아름다움 빚어 」    김지윤 기자 활짝 핀 꽃 앞에 앉아 가만히 꽃을 바라볼 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기만 하다. 금낭화는 금낭화대로 튤립은 튤립대로 특유의 모양과 빛깔로 자신만의 고유한 꽃을 피워내니 경이롭고, 또 해마다 제때에 그 자리에서 그 꽃을 피워내니 신기할 따름이다.   들판에는 청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보리가 일렁인다. 마치 저 먼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오는 것처럼.   해는 점점 일찍 뜨고 해는 점점 늦게 진다. 낮에는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밤에는 소쩍새가 운다. 시골이라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럴 때면 밤의 허공이 올록볼록하다. 낮의 시간이 길어지니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해진다. 동네 사람들의 손에는 호미며 곡괭이가 쥐어져 있고, 정원이며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나도 조금은 덜 꾸물거리게 되었고, 조금은 더 몸을 놀려 움직이게 되었다. 챙이 크게 달린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또 화단을 가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혔다.   요즘 알게 된 것이지만, 제주에는 묘목과 화초를 파는 농원이 참 많다. 집집마다 꽃과 나무가 자라는, 크고 작은 정원이 있고, 또 정원을 아주 근사하게 잘 가꾸기 때문일 테다. 모두가 정원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집 안뜰 꽃밭에만 꽃을 심는 것이 아니라 집을 에두른 돌담 바깥에도, 동네 공터에도 꽃을 심어 기른다. 내 이웃집 부부도 묘목과 화초를 재배하는 일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다. 나는 종종 이런저런 귀동냥으로 배우게 되는데, 며칠 전에는 꽃이 진 수선화 꽃대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었더니, 꽃대는 지금 잘라주고 잎은 다 마른 후에 잘라주면 알뿌리가 실해진다고 일러주었다.   어느새 나도 집에서 가까운 농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봄을 맞아 묘목을 몇 그루 사기 위해 농원을 찾아갔다. 블루베리 묘목 여럿과 한라봉 묘목 여럿을 사서 돌아왔다. 밭에는 한라봉 나무 십여 그루가 자라는데 지난 겨울 한파에 네 그루가 고사하고 말았다. 밭에서 여러 해를 자랐고 그래서 해마다 잘 익은 열매를 얻었는데 네 그루씩이나 죽었으니 여간 아쉽지 않았다. 어린 묘목을 심어서 예전 그 나무만큼의 키와 품으로 키우려면 또 여러 해가 지나야 할 것이다.   한라봉 나무는 말라 죽었지만 그 뿌리는 엄청나게 컸고 땅속으로 깊숙이 뻗어 있었다. 죽은 한라봉 나무의 뿌리를 곡괭이로 캐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동네 어른 한 분이 지나가다 내게 말했다. “이따 내 집으로 잠깐 와요. 내가 한참 전에 약속은 해 놓고 아직 주지 못한 것이 있어서요.”   농원에서 사 온 한라봉 묘목을 심고 나서 그 어른 집엘 찾아갔다. 어른은 집터에 딸린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밭에 들어서며 헛기침을 한 차례 한 후 말했다. “과일나무를 아주 잘 키우셨네요. 요즘 밭일이 많으시지요?” 어른은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이젠 힘에 부치지 않을 정도로만 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곤 밭 한쪽에 있던 석류나무 화분 하나를 내게 건넸다. “석류나무 묘목을 나눠주겠다고 말을 해놓고 여태 주지 못했는데, 이게 이래 봬도 두 해를 키웠어요.” 화분에서 키운 어린 묘목이었지만 뿌리를 잘 내렸고, 줄기와 가지가 곧게 서고 잘 뻗어 있었다. 나는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두 해라고 하셨지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요, 거기에 내내 마음과 일손을 썼을 것을 생각하니 화분을 받아 안을 때에 가슴이 뭉클했다. 게다가 애초부터 잘 길러서 내게 주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하신 일이었으니 거기에는 노심초사하는 때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폭염과 비바람과 한파도 여러 번 지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석류나무 묘목에는 그 어른의 따뜻한 배려심과 정성이 온전히 깃들어 있었다.   이즈음에 봄의 정원과 산빛이 보여주는 꽃과 신록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아껴 가꾼 것이요, 시간을 오래 들인 것이기 때문일 테다. 그 어른은 내게 준 석류 화분을 통해 이 가르침을 한 번 더 알려주셨다.   문태준 시인     

    2024.04.17 00:28

  • [삶의 향기] 나 ‘자신’을 내려놓는 정원 가꾸기

    고진하 목사·시인 봄비가 내린다. 어젯밤 돌담 밑 수로에서 청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봄비를 재촉하는 예보였을까. 봄비가 내린다. 한동안 가물든 정원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어린 봄풀들을 일으켜 세우는 빗소리가 수런거린다. 비설거지는 어제 오후에 미리 끝내놓았다. 오늘은 굳이 찬비 맞으며 동네 둘레길 걸으러 나갈 일도 없고, 텃새들이나 길냥이들도 보이지 않으니 차마 끝에서 도란도란 흘러 떨어지는 물소리나 들으며 한유함을 즐기련다.     ■  「 어린 봄풀 일으켜 세우는 봄비 정원 일서 맛보는 질박한 기쁨 더없는 행복 저절로 오지 않아 」    김지윤 기자 얼마 전 옆지기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난 올해 정원사가 될 거예요! 그런 말을 한 그녀는 며칠에 걸쳐 너저분한 정원의 마른 풀들과 나뭇가지들을 깨끗이 정돈하더니 어제는 묘목상에서 사온 산사나무, 모란, 화살나무 등을 뒤란에 심고, 텃밭에 심을 토종 고추, 쇠뿔가지, 오이, 적상추 등의 씨앗을 묘판에 뿌렸다. 정원도 그리 넓지 않고 텃밭도 작지만, 나는 그녀가 정원사가 되겠다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 속뜻을 헤아린다.   그녀가 정원 일에 몰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한 방편. 이십여 년 동안 시골살이에 익숙해졌지만, 광케이블이 시골 구석구석까지 깔려 전 세계의 소식을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알 수 있는 이 첨단세상에서 자아를 방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가의 언어를 빌어 방생이라고 했으나, 정원 일에 몰두하는 것은 숱한 세상 근심걱정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렇다. 우리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근심 공장으로 변하지 않던가.   평소 글쓰기를 놀이로 삼고 있는 나 역시 정원 일을 즐긴다. 따지고 보면 시 짓는 것도 정원 일이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아궁이에 넣을 장작 쪼개는 일도 정원 일. 어제는 텃밭 옆 전봇대 위에 둥지를 트는 까치들이 승용차 위에 떨어뜨려 놓은 나뭇가지와 진흙과 똥을 털고 씻어냈는데 그 또한 정원 일. 때로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 좋다. 아무 일 없는 삶을 바라는 이들도 있겠지만, 정원 가꾸기는 에덴동산을 가꾼 태초의 정원사처럼 지복을 누리는 일.   지복(至福), 더없는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지혜』라는 잠언집에서 사랑이란 꽃과 같아 자꾸만 물을 주고 정성을 쏟아야만 잘 자란다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오랫동안 사랑을 떠나 있으면 차츰 사랑의 육체성과 물질성과 구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마침내 양피지에 적힌 아득한 전설과 신화가 되어 작은 금속상자에 담긴 채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소설가의 사랑의 잠언은 정원 가꾸기에도 대입할 수 있겠다. 내가 게을러지거나 땀 흘리는 게 싫어 정원 일을 멀리하면 쓸데없는 잡념이 늘어나고, 감각은 줄어들고, 아상(我相)만 더 커지더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그 아상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환상. 이런 환상을 깨주는 것 역시 내 몸을 한껏 낮춰서 하는 정원 일이다.   정원 일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흙 주무르기.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을 때면 돌과 돌 사이에 흙을 비벼넣어야 하고, 흙으로 만든 아궁이 또한 일 년에 한두 번씩은 흙을 개어 연기가 새는 틈을 메우곤 하는데, 그렇게 손으로 흙을 주무를 때면 흙멍(!)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불멍도 즐기지만 흙멍에 빠져 있는 동안 내 촉감의 희열은 늘어나고 저절로 아상을 내려놓게 되더라.   이 아상이라는 허깨비를 내려놓으면 정원에서 만나는 흙, 풀, 꽃, 새, 나비, 햇빛, 빗물, 바람,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이하게 된다. 쿤데라의 말처럼 정원에서 내 ‘사랑의 육체성과 물질성과 구체성’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 정원을 가꾸며 맛보는 이 질박한 기쁨의 내구연한은 물질적 소유욕과는 달리 오래 지속된다.   정원 가꾸기를 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가 주는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삼월 삼짇날을 앞두고 해마다 정원을 찾아드는 제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후 변화가 심하고 생태 환경이 더 열악해지는데, 과연 올해도 제비가 날아들까. 그런데 예년보다 며칠 일찍 제비들이 왔다. 정원 일을 하던 옆지기가 소리쳤다. 얼른 나와 봐요. 서재 문을 열고 나갔더니 옆지기가 환한 눈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해거름이었는데, 제비 대여섯 마리가 정원 위 파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날갯짓에서 상큼하게 느껴지는 봄의 생기. 우리는 지친을 만난 듯 반가워 환대의 손뼉을 쳤다.   고진하 목사·시인    

    2024.04.16 00:28

  • [최은미의 마음 읽기] 쓰지 않은 말

    최은미 소설가 두릅 한 상자가 택배로 도착했다. 언젠가 소설 취재를 도와주셨던 분이 보내온 것이었다. 상자를 열고 두릅 향을 맡으니 그제야 봄이라는 실감이 났다. 두릅은 엄마한테 가면 늘 먹을 수 있는 나물이어서 직접 사거나 손질할 일이 없었는데 택배 선물 덕분에 올봄엔 두릅을 직접 다듬고 씻고 데쳐볼 수가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 봄은 꽃 이름 못지않게 나물 이름으로 감각된다. 봄나물의 대장격 같은 두릅은 물쑥대, 원추리, 중댕가리, 곰취 같은 나물 이름들을 불러오고 그 이름들은 내가 자라면서 들었거나 일을 하면서 들었던 여러 이야기를 다시 불러온다.     ■  「 인터뷰때 얘기 다 쓰진 못해 그래도 잊을 수 없는 그들의 삶 기억하는 한 다시 만나게 될 것 」    김지윤 기자 장편소설을 두 편 쓰는 동안 소설 취재를 위해 여러 사람을 소개받고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 갈 때마다 나는 얘기를 최대한 많이 끌어내기 위해 소설에 도움이 될 만한 질문들을 한껏 추렸지만 그럼에도 얘기가 잘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늘 한쪽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대일로 마주 앉아 점점 집중력을 높여가다 보면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내게 필요한 범위보다 더 크고 깊게 흘러나왔다.   내게 필요한 취재는 한 마을의 특정 사건에 대한 인터뷰 대상자의 경험과 현장성이었지만 그들은 그 사건 전후로 이어져온 자신의 삶도 같이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겪은 사건 당시의 감정, 관계, 행동들은 모두 그 마을에서 살아온 지난 삶의 연장선에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터뷰이(interviewee)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내가 우려했어야 하는 것이 듣지 못할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듣게 될 이야기에 대한 것이었다는 걸 점점 깨달아갔다. 나는 인터뷰이가 고심해 전하고 있는 말의 10분의 1도 소설에 쓰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구술사가처럼 그들의 생애 이야기를 양식을 갖춘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자리에서 내게 전해준 삶의 순간순간들과 기억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해석하며 말하는 방식은 인터뷰이마다 달랐다. 삶에서 가장 아픈 기억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고 현재의 고충을 우선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유년의 기억과 풍경에 대해, 어렸을 때 저수지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올려다본 하늘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인터뷰이의 이야기는 총 세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나에게 도착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게 첫 번째 단계였다면 돌아와 녹취를 풀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게 두 번째 단계였다. 인터뷰 당시에는 긴장감 때문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말과 말 사이의 망설임, 침묵, 한숨과 낮은 웃음들이 녹취 파일에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명확하게 전해진 말보다도 더 여러 맥락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글 파일에 육성과 한숨까지 모두 옮기고 나면 문자로 옮겨진 그 녹취록을 텍스트로 다시 읽는 게 세 번째 단계였다.   장편 분량보다 몇 배는 많은 인터뷰 녹취록이 생기고 난 뒤에야 나는 누군가 한 개인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단순한 소설 취재를 넘어선 무게를 지닌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너무도 고유해서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품고 있었고 그 자체로 풍부한 말들의 향연이었다. 타인의 한 시기를 듣기 위해선 그의 전 생애로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들이기도 했다.   언젠가 엄마한테 엄두릅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평지의 냉이와 달래를 지나고 낮은 야산의 미역취와 산미나리싹을 지나고 중턱의 고사리와 취나물을 지나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다보면 엄나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엄나무에서 두릅이 삐죽삐죽 돋기 시작하면 그 빛깔이 산 아래까지 퍼진다고,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왠지 잊을 수가 없어서 언젠가의 소설에 엄마의 엄두릅 얘기를 썼다. 내 엄마의 말이니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는 말을 엄마가 어떤 정조로 하는지 오랜 시간 옆에서 봐왔으니까.   나는 단 몇 시간 동안 들은 인터뷰이들의 삶을 소설로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파일 하나가 그대로 하나의 우주가 된 채 내 노트북 안에 담겨 있다. 작업 중에 노트북이 갑자기 소리를 내거나 깊은 밤에 노트북 주위에서 무언가 빛이 깜박이면 나는 내가 들었으나 쓰지 않은 말들이 내게 신호를 보내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신호가 오는 한 나는 내가 청자였던 순간들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쓰지 않더라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는 한 내게 전해졌던 타인의 삶들은 숱한 우회로를 거쳐 다른 형태의 쓰임을 가져올 것이다. 청자였던 우리가 때로 화자가 되고 화자였던 우리가 청자가 될 수 있다면 다시 만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최은미 소설가 

    2024.04.10 00:35

  • [삶의 향기] 바퀴벌레가 옮기는 말, 유언비어

    곽정식 수필가 며칠 전 밤에 물을 마시려고 부엌 전등을 켰는데 집안을 누비던 바퀴와 갑작스레 마주했다. 바퀴도 놀랐는지 움직임을 멈춘 뒤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허둥지둥 살충제를 찾았지만 마루 뒤로 황급히 사라지는 바퀴 꽁무니를 바라만 봐야 했다. 바퀴는 마주할 때마다 다른 곤충에서 느낄 수 없는 묘한 당당함이 있는데 이 당당함이 우리를 위축시킨다.   우리는 바퀴와 늘 동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에 나와 음습한 벽과 바닥 사이를 누비는 바퀴는 늘 조심스레 탐색하면서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잠시 후 또 다른 바퀴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여러 마리가 동시에 출현하진 않는다.     ■  「 사실 아닌 소문 SNS 타고 퍼져 진실과 섞인 거짓, 흥미 자극해 의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상책 」    김지윤 기자 바퀴는 오랜 세월 살피고 살피면서 자신의 종을 보존해 왔다. 심지어 개미와 같은 동료 곤충까지 의식하며 살아왔다. 그래선지 개미와 바퀴는 서로의 영역과 먹이에 대한 자율조정이 이루어져 상대방 권역을 건드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개미가 나오는 집에는 바퀴가 없다.   바퀴가 지구에 살기 시작한 건 3억 5000만 년 전인데 당시 곤충의 40%를 차지했다. 그러니 당시 지구의 주인은 바퀴인 셈이다. 바퀴는 500만 년 전쯤 등장한 인간과도 따뜻한 동굴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인간이 돌변해 바퀴를 더럽고 징그러운 해충이라면서 없애려고 혈안이니 바퀴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바퀴가 인간으로부터 이처럼 천대받자 음식물 찌꺼기는 물론이고 동물의 사체와 구토물, 심지어 가래침도 먹게 되었다. 바퀴인들 이런 게 어찌 맛있겠는가. 살기 위해서 먹을 뿐이지.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먹는 음식 위를 다반사로 옮겨 다니면서 병균을 옮기니까 오죽했으면 인간이 바퀴를 ‘비(蜚)’로 칭하면서 ‘너는 벌레(虫)도 아니다(非)’라고 비하했을까.   우리가 자주 쓰는 유언비어(流言蜚語)는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바퀴가 퍼뜨리는 말’이라는 뜻이다. 몰래 돌아다니면서 더러운 것과 접하는 바퀴를 보고 비유한 표현이다.   유언비어는 옛날에도 있었다. 노(魯)나라 때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살인자 이름이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과 같았다. 이를 착각한 이웃이 증삼의 모친에게 “아드님이 사람을 죽였대요”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소문을 들은 이웃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세 번째 이웃까지 같은 말을 하자 증삼의 모친은 실제로 현장에 달려갔다고 한다.   유언비어를 들으면 첫 번째 반응은 ‘무슨 소리야?’이고, 두 번째 반응은 ‘그럴 리가?’이고, 세 번째 반응은 ‘그래?’이다. ‘그럴 듯하지만 확인이 안 되는’ 유언비어가 오늘날에는 SNS를 타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거기에 ‘악플’도 붙는다. 이쯤 되면 유언비어 피해자는 온 세상이 자기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분노가 치미는 말이나 황당한 유언비어를 들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오랜 세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다 귀농한 친구에게 시골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무어냐고 묻자 농사일보다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듣는 것이라고 했다. 평생을 기계소음 속에서 산 친구에게 사기를 쳐서 번 돈으로 도망 와 숨어 산다는 소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자 “어떻게 하겠어. 그냥 넘어갔지 뭐. 가끔 동네 분들과 막걸리도 한 사발씩 하고…” 라고 대답했다.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Keep calm and carry on’이라는 말이 있다. 의미는 ‘쫄지 마’이다. 영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대규모 공중폭격을 예상하고 영국인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만든 슬로건이다. 한자 문화권에선 ‘놀랄 일이 있어도 끄떡하지 말라’는 의미로 ‘처경불변(處驚不變)’이란 표현을 쓴다.   유대인들은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말로 ‘라손 하라(lashon hara)’를 쓴다. ‘라손 하라’를 직역하면 ‘나쁜 혀’이다. 남이 내게 ‘라손 하라’를 하면 억울하고 당황스럽지만 의연하게 행동하는 게 상책이다. 셰익스피어도 “원수를 위해 마음의 불을 지나치게 태우지 말라”고 말했다.   살다 보면 어떤 난관이 닥치고 무엇이 나를 속상하게 할지 모른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유언비어’란 말을 만든 바퀴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모진 세월을 견뎌낸 바퀴가 말을 한다면 나직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남은 건 얻어맞아도 몸을 납작하게 만드는 탄성을 가져서지요. 인간도 생존력을 높이려면 우선 몸을 낮게 하고 탄력을 유지하면 어떨지요.”   바퀴의 이 말은 선거 때 몸을 낮추고 절을 하는 정치인들을 떠오르게도 한다. 내일 저녁이면 총선이 끝난다. 후보들을 둘러싼 유언비어도 잠잠해질 것이다. 하지만 곧 새로운 유언비어가 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유언비어 유포자들은 우리가 완전한 진실보다 진실이 섞인 거짓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곽정식 수필가 

    2024.04.09 00:47

  • [이은혜의 마음 읽기] 최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루함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우리는 언젠가부터 가족과 친구에게 홈쇼핑 쇼 호스트 같은 말을 한다. “백화점에 가서 최고 좋은 부위만 사와서 끓인 고깃국이야.” “이거 왕에게 진상했던 지리산 고종시(곶감)예요.” “그 뮤지엄 일본 건축가가 지은 건데 빛을 예술적으로 다뤘어요. 아직도 안 가봤어요?”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니 최상의 식재료만 쓰고, 내 감식안에 걸맞은 작품 전시나 건축물을 관람한다. 애호가들은 보통 자기 관점을 신뢰하며, 아는 것도 많고 달변이다. 늘 부족한 것은 시간이어서 자신이 보기에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마주하려 한다. 이런 부류를 보면 이내 지루해진다. 그래서 체호프 소설에 나오는 어설픈 관리나 손더스 작품에 나오는 하자 많은 인물들을 읽으며 날것의 삶을 목격하고 싶어진다.     ■  「 취향 도취돼 누군가 상처주기도   완벽하지 않고 결함 많은 우리들   비어 있는 곳은 늘 상상력 자극 측량하기보다 관찰당하는 게 삶 」    [일러스트=김지윤] 최고를 쫓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은 왜 따분함을 줄까. 인풋(input)이 좋다고 해서 아웃풋(output)도 좋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눈코입으로 들어간 최상품들은 삶의 품격이나 인간성과 인과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 행위들이 무언가를 생략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물질 숭배, 힘에 대한 찬사, 강한 자기주장 등이 엿보인다. 자신을 감식가나 향유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사실 소비자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바쁜 그들은 평범성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전형성’에서 맴돌다가 ‘통속성’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하다. 은근히 드러내는 힘에 대한 찬사는 더 고개를 젓게 한다. 힘은 그것을 인식하되,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고 시몬 베유도 말하지 않았던가. 선택에 대한 강한 자기주장은 취향이란 말로 표현되지만, 취향은 다른 한편 판단이고 배제이고 상처다. 취향에의 도취는 때로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기도 하며, 다른 많은 것을 난도질하다 사위어간다. 우리는 판단이나 신뢰와 무관하게 우리 자신이고 싶다.   세련됨이란 뭘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당대의 누보로망 작가들을 비판의 시선으로 봤는데, 그들이 전후 세계에 참여적으로 뛰어들기보다 그로부터 맺힌 과실만 따먹으며 형식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귀족적 취향과 엄격함을 가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그런 점에서 뒤라스에게는 못마땅한 작가였고 둘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   “우리는 도움이 되는 것만 보고 듣는다. 이 모든 제한된 사고에는 불행한 부산물이 있다. 에고다. 누가 생존하려 하는가? ‘나’다.” 조지 손더스의 이 말은 핵심을 찌른다. 우리는 보통 빛을 좇는다. 하지만 그 광채는 아는 것이 발전밖에 없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밤의 찬란함’이다. 예술가의 가장 탁월한 성취는 늘 강력한 어둠으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밤을 움켜쥐고, 밤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검정은 작가들에게 가장 친근한 색이고, 밝아진다고 해봐야 회색이거나 사막의 모래색 정도다. 베케트나 블랑쇼 모두 이런 색의 계열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주저하거나 침묵하는 향유자가 그들과 더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   무너져가는 삶의 절망을 아름답게 그린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의 작품 ‘알리바바’는 겉모습은 그럴듯하나 술에 절어 사는 남자와, 돈 많은 남자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의 하룻밤 만남을 담고 있다. 이런 인물들을 읽는 경험은 값지다. 최고는 아니지만 상처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들의 ‘에고’는 강하지 않아 천천히 그 주변에 근접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대상화되거나 소유되지 않고 오래 곁에 머문다. 이런 미학을 구현한 작가의 관찰과 묘사는 서사의 질주 속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완벽함보다 결함 있는 무언가를 좋아한다. 그게 실은 자신의 모습이거나 거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어 있는 곳은 늘 상상력을 자극해 우리가 ‘빔-채워짐’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체호프 역시 『마차에서』라는 작품에서 봄의 마력에 저항하는 불행한 여자 마리야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체호프의 열혈 팬 손더스는 이 작품에 대해 “결혼 안 하고 도로가 안 좋은 곳에 사는 외로운 여자”인 마리야가 너무 외롭지는 않도록 응원하며, 체호프에게 그 형편없는 삶에도 희망을 한 줌 가져다 달라고 마음속으로 빈다.   시야가 제한되면 가능성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을 측량하는 쪽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런 우리를 관찰하는 사람이 더 많다. 즉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을 골라낸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관찰당하는 쪽에 놓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무지(無知)가 아닐까. 그것이 제 발에 걸려 자주 넘어지는 이유이고, 결국 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간극이 크게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자기 이해를 흔들어 위험한 앎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로부터 벗어날 한 가지 방법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4.04.03 00:39

  • [삶의 향기] 항상 미소짓게 하는 마음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봄 소풍을 다녀왔다. 봄바람 선선히 불고, 나무 틈새로 햇살 내리쬐는 봄 산길을 참선 마을에서 마음공부 하는 도반들과 같이 걸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과 맨살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연분홍, 진분홍의 진달래꽃들이 피었다. 군락을 이룬 노란 생강나무꽃들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덩달아 봄새들도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좋은 사람들과 봄기운 충만한 숲을 걸으니 약간의 설렘과 반가운 감정이 일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드러움과 따스함도 느껴진다. 한없는 너그러움도 생기고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  「 일반인 감정·번뇌 수없이 겪어 “너그러운 마음이 사람의 본심” 마음이 감정 따라가지 않게 해야 」    김지윤 기자 지난 겨울 홀로 뒷산을 산책하다가 문득 떠오른 ‘산꽃들이 필 때쯤이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풍을 와야지’라는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동안거 내내 선방에 앉아 마음공부 하던 고요함이 쌓이고 쌓여서 봄을 만나니 더욱 생생한 마음의 근원이 느껴진다. 서양 명상의 대가 잭 콘필드의 스승인 태국 아잔차 스님의 ‘마음으로 말하면, 마음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 마음은 본래 깨끗하고, 마음 안은 이미 고요하다’는 말씀에 저절로 수긍이 간다.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한다.   “급하고 절실한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오줌 누는 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나 내가 몸소 가야만 되는 일이다.”   마음을 챙기는 일도 자신의 의지작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잘 쓰고, 그 마음의 주인이 되는지에 대해서 시대별로 깊게 연구했던 결과물들이 팔만대장경이다. 지금도 그 연구와 실행은 진행 중이다.   선(禪)의 스승인 달마대사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으니”라고 했다. 이 말에 법정 스님은 산문집 『말과 침묵』에서 주석하기를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의 본심(本心)이고, 옹졸한 마음은 본심이 아닌 번뇌다. 너그러운 마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옹졸한 마음은 부자유하게 만든다. 그러니 본심이 아닌 마음일 때는 속히 본심으로 돌이키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달마대사 이후 선가에서는 이 본심에 초점을 맞추고 이심전심으로 전하였다. 그 본심은 청정심이며, 고요하고, 일체의 조작이 없는 늘 여여한 평상심(平常心)이다. 평상심의 반대는 생사심(生死心)으로 개체로서의 자아나 주객의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작용을 말한다. 즉 분별하는 마음이다.   현대 과학자들이 물질을 분석하여 쪼개고 쪼개어 물질의 근원을 밝히듯, 2500년 전의 불교학자들은 마음을 철저히 해체하여 그 스스로의 성품이 없는 공(空)을 증명해 보이는 연구를 하였다.   마음은 인식작용과 알음알이이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생성, 지속, 소멸하는 변화를 지속한다. 1찰나를 1/75초로 보고, 물질이 변화하는 1찰나의 16배나 빠른 속도로 마음은 생멸한다고 초기불교의 팔리 논장 『담마상가니』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마음은 1초에 1200번이나 생멸한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일반적인 사람의 뇌파를 분석하여 하루에 4만7000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발표하였는데 초기불교에서의 마음연구에서는 이미 마음의 생멸 변화가 하루에 일억 삼천 번이 넘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따라서 유익한 마음, 해로운 마음, 과보의 마음,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 분류하여 그 가짓수를 89가지 마음, 121가지 마음, 21만2021가지 마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마음에는 존재지속심이 있어서 생명을 지속하고, 재생으로 연결해주는 역할도 있다. 이 존재지속심은 한 인식 과정에서 다음 인식 과정으로 넘어갈 때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눈, 귀, 코, 혀, 피부, 의식의 여섯가지 인식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여섯 가지의 인식대상을 자아 관념의 필터로 굴절시키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갖가지 감정과 번뇌가 수없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깊이 한 사람은 감각 영역과 마음 영역을 통해서 입력된 정보들이 지혜의 안목으로 여과되어 들어오므로 욕심내고, 화내고, 고집부리는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은 평정심이 유지되어 본래의 맑은 상태로 밝게 빛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므로, 투명한 인식 활동이 일어난다. 이때의 마음은 인과를 갖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기쁜 마음이고, 항상 미소를 짓게 하는 마음이다.   날마다 미소 짓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자신을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본심인 마음 안은 이미 고요하고, 밝은 지혜가 가득하다. 마음이 감정에 따라가지 않도록 챙겨야 한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2024.04.02 00:58

  • [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새도 지치면 제 둥지로 돌아간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창경궁 앞을 지나다 보니, 나무에 작은 새집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촘촘하게 잘도 지었다. 푸른 기운 도는 잔가지가 삐져나온 것이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새 둥지는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짓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면 더 신기하다. 그런데 가로수 한 그루에만 새 둥지가 있는 게 아니었다. 옆의 나무에도, 그 옆의 나무에도 둥지를 틀었다. 빈 둥지로 보이는 것까지 하나둘 세다 보니, 무려 열일곱 개까지 세었다. 철새 서식지라도 되는 걸까? 창경궁 앞쪽 가로수에만 이렇게 집중해서 새들이 집을 짓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  「 머물고 있는 자리가 가장 소중 마음의 근본자리로 돌아가야 탐욕, 성냄, 어리석음 버리면 돼 」    김지윤 기자 지인에게 창경궁 앞에 새 둥지가 참 많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새는 건축가다』(차이진원 글)라는 책이다. 새에 관한 흥미로운 얘기가 많았다. 새에게는 저마다의 특정한 둥지 형태가 있는데 어떤 새는 건초 줄기로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를, 어떤 새는 고목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런 새의 건축본능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주어진다고 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잘 짓는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새는 저마다의 환경 적응 방식에 따라 둥지를 배치한다. 이를테면, 나무에서 활동하는 새는 숲에 집을 짓고, 지상에서 활동하는 새는 풀숲이나 바위틈에 둥지를 숨겨두며, 바닷새는 물결 따라 움직이는 수초처럼 보이도록 수면 위에 집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흥부전에 나오는 제비처럼 사람들과 친밀한 새라면, 우리가 사는 지붕의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알을 품으며 산다.   새에 관한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의 삶과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가정이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겪으며 살아간다. 분명한 것은 집안의 가장이거나 부모라면, 어떤 세파가 몰아쳐도 끄떡없이 가정을 보호하려 들고, 될 수 있으면 가정을 튼튼하게 지켜내려 애쓴다는 점이다. 우리 부모님도, 저 윗대 조상님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도 절에 와서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원한다. 먼저 가신 부모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엎드려 절하고, 화목한 가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려 명상에 집중한다.   물론 나처럼 출가한 경우엔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출가한 자에게 있어 가정은 그리 큰 의미도 없고, 삶에 미치는 영향도 적은 편이다. 그때그때 시절 인연에 따라 조화롭게 어울려 살다 가면 그뿐이다. 하지만 생각은 늘 그러하나, 몸은 그러하질 못할 때가 많다. 고향 집 떠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간혹 몸이 아프면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던 우렁이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 새도 지치면 제 둥지로 돌아간다더니, 제아무리 출가했어도 마음이 여려지면 제 둥지를 찾지 못한 새처럼 허공을 헤매는 듯하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이 있다가 사라졌을 때, 더 크게 ‘없음(無)’을 인식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습관처럼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함을 투정한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스스로 가진 게 없다고 괴로워한다. 나도 고향을 떠날 땐 고향이 소중한 줄 몰랐다. 산속에 살 때는 산속 절이 춥고 불편하기만 했다. 공기가 좋은 줄도, 물이 맑은 줄도 모르고 당연한 듯 여겼다. 그러다 산속 절을 떠나 도심에 깃들어 살아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머물고 있던 그 자리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소중한 것들은 어느덧 내 기억 속에만 흔적으로 남았다. 출가 여부를 떠나 지난 생의 기억들을 돌아보면, 새의 귀소본능만큼이나 우리에게도 그런 회귀본능이 있는 것 같다. 치유가 필요한 어느 순간이 오면, 떠나온 둥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곳이 꼭 고향 집이나 부모님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잠시라도 몸과 마음을 안온하게 쉴 수만 있다면, 어느 빈 둥지인들 어떠랴 싶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 영국의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남긴 귀소에 대한 의미를 불교에서 찾으라 하면, 곧장 마음의 근본 자리로 돌아갈 것을 권하리라. 중생의 마음을 넘어 부처의 마음자리로 가는 길 말이다. 게다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만 여의면 언제든 가능한 마음자리니, 본질만 꿰뚫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면, 부처 마음 따로 있고 중생 마음 따로 있지는 않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듯’, 그저 마음 씀씀이에 따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 법이다. 자, 그럼 어떻게 마음의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2024.03.27 00:28

  • [삶의 향기] 싸움의 기술

    김미옥 소설가 영국의 작가 존 버거가 출연한 다큐 중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인도인으로 추정되는 한 청년이 질문했다. 부정부패로 실각한 지도자를 사람들은 왜 다시 선출하는 걸까요? 그의 대답은 “정의가 지겨워서”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웃고 나도 웃었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자유가 지겨워서 독재자를 불러들인다지 않는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역사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는 장면이었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여론조사 기관에서 전화가 오고 이사 전과 후의 동네 지역구 후보가 동시에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투표 일자가 가까워지니 각자의 정치관을 피력하느라 시끄럽다. 친구 사이에도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다르면 설전이 벌어진다. 확인도 불가한 각종 유언비어와 음해성의 정보가 난무한다.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거나 모임이 끝날 때까지 서로 외면하기도 한다.     ■  「 단순해져야 기운 낭비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면 적이 지친다 확신 가지고 자기답게 싸워야 」    [일러스트=김회룡] 선거와 싸움의 목적은 승리하는 데 있다. 어떤 선거 전문가는 강한 자가 옳은 자를 이긴다고 했다. 옳고 합리적인 정치인은 사사건건 반대하고 분노하는 공격적인 정치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기술 중에 몇 가지가 흥미를 끌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말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라. 대중은 단순하다. 대중은 자질이 아니라 승패를 본다. 상대를 이길 수 있다면 흠이 있는 후보에게도 표를 주는 것이 대중이다. 대중은 이길 수 있는 강한 자에게 표를 던진다. 의아한 부분도 있지만 수긍되는 지점도 있다. 어떤 음해나 공격에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정신력이다. 정신이 무너지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패색이 짙어진다. 정치인이 아니어도 단순함은 싸움에서 유효하다.   좋지 않은 소문에 매출 실적도 떨어지고 불신받는 개인 사업자가 있었다. 판매 상품을 불량품으로 호도하고 인성까지 들먹이는 악성 유언비어였다. 소문의 진원지가 경쟁자인지 한때 동업자였는지 아니면 소비자인지 추측도 불가했다. 주위의 모든 이를 의심하니 정신이 피폐해져 병원에서 우울증 처방까지 받았다. 밤늦게 하소연하는 그녀에게 내가 한 말은 싸움의 기술이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은 동네 바보다. 사업을 하면 반드시 경쟁자가 적으로 나타나고 음해와 모략은 기본이다. 적은 상대방을 집중하지 못하게 혼란에 빠트려 정신을 먼저 무너트린다. 아프거나 지친 모습을 보이지 말라. 그럴수록 자신을 가꾸고 일상에 충실해야 한다. 모두를 의심하면 전선이 확대된다. 당신의 공격은 누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판매에 매진하는 것이다. 상품 선전을 강화하고 공신력 있는 기관의 검증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당신이 지치지 않으면 적이 지친다. 그녀는 나의 조언에 힘이 생겼다고 했는데 아마 ‘적도 지친다’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숨어있는 적을 찾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면 안 된다. 가장 큰 적은 흔들리는 자기 정신이다. 엉뚱한 곳에 기운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단순해져야 한다.   선거에서 싸움의 기술도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이슈라도 정면 돌파해야 한다. 상대를 두려워하면 이길 수 없고 회피하면 패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분노하는 정치인에는 표를 주지만 경멸하는 정치인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분노하되 경멸하지 않기가 쉬운 일이겠느냐만 이럴 때 영화 ‘대부’의 명언이 떠오른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그러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단순하고 솔직하게 확신을 가지고 자기답게 싸우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싸움의 기술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도 직결된다. 목표가 굳이 적일 필요는 없다. 운명은 타고난다지만 성격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바꿀 수 있다.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고 긍정적이고 유쾌한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의 적은 내가 된다. 가장 큰 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을 소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친구다. 격려하고 조언하고 위로하는 우정이야말로 인생의 큰 동지가 아닐까 싶다. 선거에 돈을 주고 전략가를 고용한다면 인생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친구가 아니겠는가.   대부분 투표소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찍는다고 한다. 우리는 관성처럼 이길 수 있는 자를 찍는 것이 아닌가 의문해야 한다. 존 버거의 ‘정의가 지겨워서’는 다시 생각해 볼 말이다. 대한민국의 선거는 어느 나라보다 박진감이 넘친다. 국민이 정치에 이렇게 적극적인 나라도 드물 것이다. 온라인에서도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를 공개적으로 응원한다. 나는 양쪽 진영의 지지자들이 쓰는 글들을 관심 있게 읽는다. 선거의 목적은 승리이지만 토론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일 것이다. 상대의 주장을 곱씹으며 일면 수긍하면서 변화를 주고받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거에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옳은 자가 승리하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원하는 후보는 옳고 강한 자이다.   김미옥 소설가     

    2024.03.26 00:33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여우비와 봄 모종

    문태준 시인 지난 일요일에 제주에는 봄비가 내렸다. 봄비의 빗방울이 유리창에 자분자분 떨어지는 소리에 새벽에 잠을 깼다. 누워서 그 소리를 한참 들었다. 간헐적이었지만 부드럽고 조용조용하고 찬찬했다. 봄비의 빗방울 소리는 마치 어르는 소리 같았다. 졸려서 칭얼대는 아이를 엄마가 달래듯이. 비는 낮에 그쳤다. 마치 봄 햇살의 기세에 밀린 듯이.   한 지인도 봄비에 시심(詩心)이 일었는지 윤동주 시인이 쓴 ‘햇비’라는 시를 내게 메시지로 보내왔다. 시의 첫 연은 이러하다. “아씨처럼 내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햇비는 여우비를 이르는 단어이니 볕이 든 날에 잠시 오다가 멎는 비를 일컫는다. 푸슬푸슬 내리는 비의 성품을 아씨에 빗대었다. 적은 양이지만 이 비 덕에 만물이 더 왕성하게 자란다고 보았다. 옥수숫대처럼 푸르게 높게 늠름하게 자란다고 썼다. 어쩌면 너무 큰 기대가 들어있는 듯도 하지만, 그만큼 고맙고 귀한 비라는 뜻이겠다. 윤동주 시인이 ‘겨울’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라고 겨울 절기를 노래한 것에 비하면 이 시 ‘햇비’에는 여우비를 노래했으나 오히려 봄 혹은 여름날의 햇살과 대기의 따뜻한 기운이 잘 느껴진다.     ■  「 자분자분 듣는 비에 봄 완연해져 귀하게 모종법 알려준 가게 주인 마음에도 빛 들이고 움 틔웠으면 」    마음 읽기 내 사는 집 주변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 호미를 쥘 때가 되었다. 풀이 자라는 밭으로 들어설 때가 되었다. 이 집에서 또 저 집에서도 밭에 들어가 풀을 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날도 일찍 샌다. 마을에서 시내로 가는 첫차는 아침 6시 30분에 있는데, 그 첫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가는 사람이 어느 집 누구인지 짐작할 정도로 날이 환해지는 시간이 빨라졌다. 마을 청년회에서는 이번 주말에 벚꽃이 피는 때에 맞춰 마을 축제를 열기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가 멎고 나서 오일장에 갔다. 톳과 물미역, 미나리를 파는 집을 지나 창포를 파는 가게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어린나무와 화초와 모종을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백합 구근이 나와 있기에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백합 구근을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하다 일어서 다른 가게로 갔다. 야생화 작은 화분을 몇 개 샀다. 그러고는 여러 종류의 모종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오이 모종과 고추 모종, 상추 모종을 샀다.   모종을 파는 가게 주인은 뜻밖의 말을 내게 건넸다. 꽃샘추위가 온다고 하니 당장에 모종을 심지 말고 이틀 밤을 집안에서 재운 후에 노지에 모종을 하라는 것이었고, 노지에 모종을 심은 후에라도 날이 추워지면 이렇게 해서 모종에 씌워주라며 밑을 자르고 뚜껑을 뗀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을 높이 들어 보였다. 밑을 절단하고 또 뚜껑을 제거해서 공기를 통하게 한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은 말하자면 작은 온실 같은 것이었다. 그 작은 온실에 의지해 모종은 각각 제 지닌 뿌리를 땅속에 내리고 바람을 피하며 볕을 받아 자라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턱대고 모종을 심은 후에 손을 놓고 기다리는 일이 작물을 기르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물의 생장을 도우려는 마음을 한시라도 쉬지 않는 것이 작물을 기르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었으니 아직도 일이 서툰 나에게 자상하게 일러준 가게 주인의 얘기는 이 새봄에 내가 받은, 무엇보다 소중한 말씀의 선물이었다.   나는 최근에 ‘물결-삽목(揷木)’이라는 졸시를 지었다. 시는 이렇게 짧게 적었다. “낮의 화초(花草) 가지를 잘라 밤의 검은 땅에 심는다// 돋은 눈이 막 터지기 전의 긴 미명(未明)// 삼월의 눈은 살쾡이처럼 한 차례 더 찾아오리라” 삽목의 경험을 살려 절기의 미묘한 이동을 함께 노래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이 삼월은 밤의 어두운 시간에 낮의 밝은 시간을 보태는 때이고, 삽목한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나기 직전의 때이며, 날이 밝아 올 무렵의 동쪽 하늘과도 같은 미명의 때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추위도 한차례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시간이 늘어나고 삽목을 한 화초 가지에 싹이 움트는 이런 변화의 에너지는 더 세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행간에는 삼월을 사는 이즈음의 마음도 화초 가지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은 배어 있을 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백합 구근을 망설이다 그만 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소심해서 구근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 말았다. 사서 온 모종과 이틀을 살고, 그 모종을 심고, 과일나무에 비료를 주고, 풀을 뽑은 후에 장이 서는 날에 가서 백합 구근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봄볕이 백지처럼, 백합꽃의 흰 빛깔처럼 사방에 가득 내릴 것이다. 이 세계가 커다란 온실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문태준 시인 

    2024.03.20 00:28

  • [삶의 향기]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황주리 화가 조병화 시인의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라는 시 구절을 기억하면서 늘 맞는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 시 구절이 너무 당연한 말씀이 된 지 오래다. 요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또 하나의 당연한 말은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아닐까 싶다. 어디서나 ‘진정한 우정 같은 거 없다’ 같은 제목들이 넘쳐난다. 부담스러운 진심을 남에게 기대하지 말자는 영리해진 현대인의 마음 자세일지 모른다.     ■  「 점점 소중해지는 혼자의 시간 선물인지도 모르고 보낸 날들 오늘도 나의 귀한 하루를 썼다 」    그림=황주리 언젠가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지인 몇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유명 시인 J 선생님이 혼자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으셨다. 혼자 오셨나 물으니 그렇다 하셨다. 맛집이라 소문나서 일부러 와봤다 하신다. 속으로 의아했지만, 나이 들면서 그 기분을 이해한다. 나도 요즘 부쩍 혼자 다니는 걸 즐긴다. 할 일을 마치고 식당 창가에 앉아 가장 친한 친구 ‘나’ 자신과 함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식사한다. 맥주 한 잔이 정취를 더한다. 이럴 때 산다는 건 선물이다. 타인에 대한 애착이 점점 없어지는 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버리기의 연습일지 모른다.   애착뿐 아니라 낡은 생각들도 버려야 한다. 서른 살 조카가 사랑하는데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는 양성애자라고 떳떳이 말하는 걸 보면서 한 방 두들겨 맞은 기분이던 날도 오래전 일이다. 현실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또 하나의 성, ‘에이섹슈얼(asexual)’이란 낯선 단어가 떠오른다. 우리말로 무성애자다. 그에 비하면 양성애자는 따뜻하게 들린다. 문득 ‘너는 뭔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점점 한 친구와 만나기보다는 여럿이 모이는 게 즐겁다. 그것도 아주 가끔이라야 한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가 지닌 인품과 성숙함과 유머를 함께한다는 것이다. 원래 그랬던 건지, 세월이 지날수록 후퇴하는 건지, 점점 낯설어지는 오래된 친구와의 시간이 아까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가장 친한 친구 ‘나’랑 노는 게 낫다. 시간 깍쟁이가 되어가는가 보다. 오늘도 내 귀한 목숨의 하루분을 다 써버렸다. 젊을 때는 못 느끼던 죄책감이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밑도 끝도 없이 긴 넷플릭스 중국 드라마를 이제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끝이 나 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엉뚱하게도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의 구호, ‘하루를 이틀만큼 일하자’는 문구가 생각난다. 나는 그 문구를 ‘하루를 이틀처럼 놀자’로 바꾸고 싶다. 젊을 땐 늘 누군가 그리웠다. 지금은 나 자신이 그립다. 귀한 줄도 몰랐으므로 지나간 시간은 아쉽지도 않다.   늙음은 때로 참 좋다. 마일리지를 모으고 모아 내 나이 환갑에 내가 내게 주는 생일 선물로 뉴욕 가는 일등석을 타본 적이 있다. 일등석은 비즈니스석하고도 달라 더 독립적이고 좀 외롭다. 자고 있으면 방해될까, 식사 시간이 와도 깨우지 않는다.   오래전 마카오 여행길에 비싼 새 호텔과 비싸지 않은 오래된 호텔의 장단점을 물으니 비싼 호텔은 명품을 파는 면세점과 연결되어 있고, 덜 비싼 호텔은 옛 골목들을 둘러보기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생도 그렇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시집살이에 주눅이 들어 많지 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분을 본 적이 있다. 사별한 그분은 사실 돈밖에 가진 게 없을 정도인데, 본인은 그걸 모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다.   우리의 그 터무니없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비록 타인의 경험이라도 늘 무언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대여 그대에게서 나를 본다.’ 그게 인생이니까. 개인이 아닌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우주도 다 그럴 것이다. 우리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 지금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삶을 이어간다. 비록 지구의 수명이 다해 결국은 끝날지라도.   나는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던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 풍경으로 되돌아간다. 오래된 내 인생의 호흡법이다. 지구의 신비로운 자연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세상 곳곳에 사는 희귀한 동식물들을 볼 때마다 내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의 그 시 구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구십 살 정신과 의사의 절절한 말씀이 오늘도 내 멍때림을 깨운다.   인생은 긴 지루함과 기다림, 초조함과 외로움, 순간의 기쁨과 슬픔, 내게만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 고통, 선물인지도 모르고 흘려보낸 많은 무사한 날들, 그리고 그 끝은, 아니 완성은 언젠가 결코 미룰 수 없이 다가올 원고 마감이다.   황주리 화가 

    2024.03.19 00:29

  • [최은미의 마음 읽기] 기억을 나눈다는 것

    최은미 소설가 사랑하는 여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현장 재현을 기획하는 한 남자가 있다. 여자와 남자는 몇해 전 전쟁터에서 헤어졌다. 당시 중령이었던 남자는 여자를 피신시키기 위해 도하 작전 중이던 강가에서 여자와 여자의 남편을 배에 태워 보낸다. 하지만 여자의 남편은 여자의 눈앞에서 죽고 여자는 2년 동안 군대에 끌려다니며 여성의 몸으로 폭력을 겪게 된다.   남자와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여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반 짐승처럼 사는 ‘미친’ 상태였다. 남자는 슬픔에 빠진다. 그녀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여자’로서의 모습 또한 모두 잃은 채 광기와 야생의 상태에서 말을 잃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어떻게든 여자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들이 헤어졌던, 그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던 강가를 여자의 눈앞에 그대로 재현하기로 마음먹는다.     ■  「 과거 사건 그대로 재현 가능할까 기억, 갑자기 도래하는 거라면 매개하는 사건은 철저한 현재형 」    김지윤 기자 남자는 일꾼들을 불러모아 강을 연상시키는 운하를 파고 수백명의 농부를 고용해 군복을 입힌다. ‘그는 그렇게 그 모든 장면을 최대한 참혹하게 재현하기 위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고’ 몇 개월의 준비 끝에 여자를 그 현장 속으로 데려온다. 여자는 남자가 기획한 그 생생한 스펙터클 속에서 마침내 기억이 살아나 사랑했던 사람을 알아보지만, 기억이 엄습한 동시에 죽고 만다.   이것은 발자크가 1830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아듀』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남성 인물 필립의 절절한 슬픔과 사랑이 사실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임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사건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대상을 앞선 순간 그 욕망은 망각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자를 드디어 죽게 만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가 재현의 가능성에 대해 던지는 깊은 회의는 200년 후인 지금의 창작자와 서사 소비자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과거의 사건이나 누군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가능하다는 환상이, 매끈하게 서사화해 소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정작 누락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핵심이 흩어지는 사건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가설 수 있는가.   이 소설은 또한 기억의 속성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기억은 내가 주체가 되어 불러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시에 나를 엄습해오는 것일까. 오카 마리는 『기억 서사』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과도 유사하게 불시에 시간을 건너 떠오른 서양배의 감각을 얘기하며 사람이 무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임을, 그것이 바로 기억의 속성임을 말한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억이 갑자기 도래할 때 기억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내 신체를 습격해오며 그럴 때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은 더 이상 과거의 영역이 아닌 철저한 현재형이 된다. 항상 현재형으로 회귀하는 사건은 시제가 파괴되어 있으며 거기에 기억의 근원적인 폭력성이 있다고 오카 마리는 말한다.   『아듀』의 여성 인물 스테파니처럼 철저한 망각 속에 자신을 놓아두지 않는 이상 사건을 겪은 이들은 여전히 2년 전을, 10년 전을, 70년 전을 현재형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테파니의 기억에 조금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일까. 스테파니가 경험한 폭력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와 기억과 재현을 주제로 커리큘럼을 짠 수업 개강을 앞두고 나는 오카 마리의 한 문장을 학생들과 같이 읽으며 학기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 챕터를 복사해 강의실로 갔다. 이십여년 전 번역됐다 아주 오래 절판 상태였던 발자크의 『아듀』가 올해 3월이 되기 직전에 새로 번역돼 출간되었단 소식을 전하면서 이건 거의 우리 수업을 위한 출간이 아닐까요? 같은 실없는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오카 마리의 『기억 서사』 또한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올해 3월 중에 재출간이 된다는 소식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두 책이 다시 출간된다는 건 두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2024년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걸 반증하는 일일 것이다. 시제가 엉킨 사건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억에 참여한다는 것, 그 가능성을 숙고하는 오카 마리의 문장을 더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돼서 좋다.   ‘폭력적인 사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에 그 사건의 폭력성의 핵심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바로 그와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최은미 소설가 

    2024.03.13 00:27

  • [삶의 향기]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

    고진하 시인·목사 꽃샘바람이 아침부터 세차게 불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나물을 뜯으려고 들판으로 나갔으나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칼바람이 너무 매워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빗장을 걸려고 하는데, 낡은 빗장이 바람을 못 견디고 툭 부러졌다. 이런, 이걸 어쩐다?   어쩌긴. 당장 만들어 끼워야지. 빗장을 걸어 대문을 닫아놓지 않으면 온종일 대문은 삐그덕~삐그덕~몸살을 앓을 것이다. 나는 농사 연장을 비롯한 잡동사니를 넣어둔 어둑한 창고를 뒤졌다. 지난해 가을 등산을 갔다가 희귀한 물푸레나무를 발견하고 도낏자루로 쓰려고 나뭇가지 한 가닥을 잘라다 보관해 둔 기억을 더듬어 너저분한 창고를 샅샅이 뒤져 기어이 물푸레나무를 찾아냈다.     ■  「 세월의 아픔으로 생긴 나뭇결 구불구불 견디며 형성된 지혜 직진만 있는 직선의 삶과 대조 」    삶의 향기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의 이름도 싱그러운 물푸레나무. 그 나무 곁에 서면 내 몸도 푸르게 물들 것 같은 물푸레나무. 목질이 낭창낭창하고 단단한 물푸레나무는 도낏자루의 용도로만 아니라 옛 농부들은 도리깨나 소 코뚜레를 만들 때도 사용했고,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산간에서는 설피의 재료로도 각광을 받았다.   나는 창고에서 찾아낸 물푸레나무로 빗장을 깎기 시작했다. 어디서 목공 기술을 배운 적이 없지만, 낡은 한옥에 살다 보니 웬만한 것은 손수 깎고 고치고 수리하는 것에 나름 이골이 나 있는 터. 그런데 애써 깎은 빗장이 대문의 틀에 잘 맞지 않았다. 나무의 옹이 부분이 자꾸 걸려 몇 번씩이나 깎고 또 깎았다. 빗장을 완성하고 나니 한나절이 획 지나갔다.   완성된 빗장으로 대문을 잠그니 계속 삐거덕거리던 소음이 멎었다. 곁에서 빗장 만드는 걸 거들던 옆지기가 손뼉을 쳤다. 와우, 당신 참 대단해요! 언제 들어도 응원과 칭찬은 생기를 북돋워 주지.   연장을 다 정리한 후 난 쪽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본다. 배웅과 마중의 감정을 지닌 대문. 오늘처럼 심하게 바람이 몰아칠 때 들리는 대문의 마찰음을 소음이라 했지만, 사실 나는 대문이 여닫길 때 나는 마찰음을 무척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대문을 ‘우주의 명창’이라고 불렀을까.   내 나이보다 연륜이 높은 대문. 우리 집 보물 1호인 솟을대문. 저 깊고 푸른 숲의 아름드리나무였을 적, 햇살과 바람, 비와 눈, 낮과 밤, 하여간 저 사계의 족적이 대문(大紋)으로 새겨진 대문(大門)의 문양도 사랑한다. 저 아름다운 문양이 나무에 새겨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절을 구불구불 통과했을까. 나무들이 자란 숲길도 구불구불하지만, 나무의 나이테를 만든 시간 또한 구불구불하지 않았을까.   그날 밤 나는 대문을 바라본 소감을 몇 줄 시로 옮겼다.   “나는 문장을 짓는 사람인데./저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파릇파릇한 말씀을 받아적을 수 있을까./서까래만 한 큰 붓을 들고 있진 않지만/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대문장을 휘갈길 수 있을까.”   ‘파릇파릇한 말씀’은 문이 여닫길 때 나는 소리와 아름다운 문양 때문에 연상된 시구인데, 그 파릇파릇한 말씀은 직선의 마음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문명에 길들어 느림을 견디지 못하고 빠른 직선의 삶을 선택할 때가 있지만, 나무의 시간, 자연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이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구불구불한 것을 견디지 못해 구불구불한 것을 기어이 직선으로 펴고 말 것이다.   직선이 무엇이던가. 우회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함, 다른 생명을 살필 줄 모르고 앞만 향해 분주하게 내달리는 마음. 직선으로 곧게 뚫린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내달리면서 도로 옆의 풍광을 즐길 틈이 있던가. 달리는 자동차에 야생 동물이 치여 숨지는 사고인 로드킬을 우리는 자주 목도하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했다. 하느님이 없다는 말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되었다는 것. 직선을 애호하는 사람은 자기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되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이런 사람은 오직 가속과 직진의 욕망뿐이다. 나무의 아름다운 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 아름다운 결이 불편과 아픔의 구불구불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생긴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매일 솟을대문을 여닫으며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문장을 갈망하지만, 그런 문장을 얻으려면 ‘사람보다 더 많은 사후(死後) 생’을 갖는 나무의 말 없는 말씀에 늘 귀 기울여야 하리라.   고진하 시인·목사 

    2024.03.12 00:26

  • [이은혜의 마음 읽기] 낭독과 그림과 글쓰기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면 인간은 삶을 끌어올리고 유지해줄 다양한 수단을 찾아 나선다. 글쓰기와 낭독, 그림 그리기는 그중 하나다.   말은 거의 늘 상대를 설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상적인 교감 역시 설득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키케로의 『수사학』은 힘을 발휘해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의 효과를 어떻게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 책 한 권을 통틀어 알려준다.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으며, 의도하는 바는 간접적으로 숨자리와 리듬을 형성하며 에둘러갈 때 성취할 수 있다.     ■  「 대상에 효과 발휘하기 위해선 장치와 형식 존중하는 것 중요 적절히 갖추는 형식의 제약은 그림·글·목소리에 생명력 부여 」    김지윤 기자 이렇게 인간은 언어 등의 관습을 갈고닦고 예법을 세련화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젓가락질을 배우는 것은 음식을 서툴게 집어 자신과 상대에게 불안감과 불쾌감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며, 남의 집을 방문할 때 과일 바구니라도 가져가는 것은 집주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깍듯이 드러내기 위해서다. 빈손은 경제적 궁핍이 아니라 무성의다. 형식은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점점 강화하고, 감정 역시 형식이 있어야 점점 고조된다. 즉 삶을 유지하는 데 형식과 관습은 간과될 수 없다.   그림 역시 하나의 형식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 그리고 가시성 너머의 구조를 그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보이는 것의 얕음과 속임수를 꿰뚫어 더 멀리 나가기 위한 도약이다. 이때 형식이 밑바탕이 돼준다. 색과 빛, 형태와 형태 아닌 것을 표현할 질감 있는 도구가 있을 때 그것은 물질성을 구현하면서 우리 감정을 강화한다. 붓질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흐름 속에 에너지를 싣는다.   나는 요즘 매일 하루 한 시간씩 그림 한 점을 그린다. 수채와 유채를 동시에 사용하며, 관념을 제거하고 관찰하는 대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붓질을 한다. 숲과 카페, 집과 사무실에서 그린다. 눈은 표면에 닿지만 표면 너머를 보려고 하며, 시야와 붓질 사이에 있는 공기를 느끼면서 그 호흡을 획으로 가져오려고 한다. 획에 떨림이 유지되고 있는지 자신할 순 없지만, 순간의 붓놀림 속에 아는 것, 즉 관념이 배어들지 않도록 애쓴다.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진부함마저 있다면 죽도 밥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역시 공기 중의 소리인 말에서 시작된다. 출판사에서 하루 종일 원고를 읽고 집에서도 밥 먹을 때를 빼곤 말없이 책을 읽는다. 그러면 검정 글씨 속으로 땅을 파고 들어가 의미는 깊어지지만, 정작 그 문장들이 소리와 리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게다가 묵독으로 읽는 것은 속도를 빠르게 해주지만, 읽기는 말하기 속도와 비슷해야만 성찰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점점 체감한다. 어떤 예법이나 형식이 느리게 수행되는 것의 장점을 강조한 사람은 많다. 화가 폴 세잔은 “나는 그림을 아주 천천히 그린다”고 말했는데, 그래야만 시시각각 복잡한 형태를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 정답이 있지 않듯, 낭독에도 정답이 없지만 형식은 적절히 갖춘다. 즉 낭독자는 소리에 극도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화려함보다 오히려 모노톤의 음색일 때 더 풍부한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가령 뒤라스는 텍스트를 단조롭게 낭독했다. “느린 구두법과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마치 단어들의 옷을 벗기면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찾는 것과 같죠.” 미국의 시인 존 애시베리도 소리 전문가가 연구할 만한 마지막 시인으로 꼽힐 만큼 시 낭독에 있어 전설적인 인물인데, 그 역시 절제되고 겸손한 하나의 음색으로 몽환성을 구사했다. 세잔이 살아 있을 때 그림을 ‘못 그린다’는 평가를 받았듯이, 애시베리의 낭독을 듣는 청중 절반은 지루하다며 자리를 뜬다. 하지만 소리를 연구하는 마리트 맥아더에 따르면 애시베리는 “넓은 모음을 그대로 살리는” 억양으로, 소리의 양감과 폭이 대단하다. 나는 애시베리의 음정과 타이밍의 절묘함을 분별하고자 다른 낭독자의 것과 비교하며 듣는다. 그러면서 활자들이 소리로 변할 때 문장 속 리듬을 더 잘 고칠 수 있고, 균형감을 조절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차오른다. 철학자 김영민 역시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낭독을 강조했는데, 낭독은 “혀와 입의 문제라기보다 차라리 정신의 고요한 지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깨치는 앎은 내가 내 삶 안으로 맞아들이는 ‘형식들’에 의해 가까스로 획득된다. 형식은 일종의 제약이어서 닳은 붓을 쓴다든가 색깔을 두 가지로만 제한하는 등의 조건을 거는 게 효과적이다.   매일 하는 운동 역시 형식 안에서 수련되고 연마된다. 즉 어떤 효과를 노릴 때는 대상을 거칠게 다루기보다 장치와 형식을 마련해 통과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그림, 글, 목소리 모두 생명력을 간직하며, 매 순간 공기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두께감을 발휘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4.03.06 00:28

  • [삶의 향기] 서열과 배려의 기러기비행

    곽정식 수필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서해안에 가면 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이라는 말에 솔깃하여 군산 행 버스 여행에 합류했다.   군산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후 일행과 산책을 하던 중 북쪽 하늘로 비행하는 기러기 가족을 보았다. 계절로 비추어봐 그들은 군산, 서천에서 강화도와 옹진반도, 중국 동북 3성을 거쳐서 고향 시베리아로 가는 귀향길이리라. 먼 길을 떠나는 기러기들의 고달픈 비행인데도, 탐조객들에게는 석양과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기러기가 겨울 하늘을 나는 광경을 보면 색(色)과 공(空)의 조화가 느껴진다. 또 기러기가 떠나간 창공은 마음속의 공허함인 허(虛)를 깊게 남기는 듯하다.     ■  「 신·예·절·지 갖춘 기러기 비행 배려 배우고 실천하며 날아가 학교·가정·사회 함께 힘써야 」    삶의 향기 그리고 기러기가 남긴 공허함은 이름 모를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 그리움이 사무쳐 시와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기러기가 떠난 창공을 보면서 쓸쓸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시인 박목월은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 리~”로 시작하는 ‘이별의 노래’라는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모골이 송연해진 작곡가 김성태는 여기에 곡을 붙였다. 이제 노래가 된 ‘이별의 노래’는 성악가에 따라 슬프고 비장하게, 또 때로는 장엄하게, 심지어 경쾌하게도 들린다. 노래의 주인공이 된 기러기는 이처럼 시가 되고 노래가 돼 눈물이 되었다가 환희로 변하기도 한다.   기러기는 앞에서 발음해도 뒤에서 발음해도 ‘기러기’다. 그래서인지 기러기는 좌우 대칭의 대오를 갖추고 앞에서 나는 기러기와 뒤를 따르는 기러기가 신호와 울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V자 형태의 비행을 한다. 옛사람들은 이런 기러기의 비행을 가리켜서 ‘안행(雁行)’이라 했다.   조선의 생활 백과사전 ‘규합총서’는 안행(雁行)에는 모름지기 신(信), 예(禮), 절(節), 지(智)의 네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때에 맞추어 왔다가 때에 맞추어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아갈 때도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답하니 그것이 예(禮)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라.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잠을 자되 하나가 순찰을 서니 지(智)가 있다.” 안행의 네 가지 덕(德) 중 세 번째인 절(節)을 지키는 것을 수절(守節)이라 한다.   안행이란 말은 기러기가 나는 모습을 말하지만 ‘안행피영(雁行避影)’은 기러기가 앞으로 함부로 나서지 않고 옆으로 피하듯이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유래를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쓴 장자역주(莊子譯註)에서 찾아보았다.   주(周)나라 때 사성기(士成綺)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를 찾아왔다.   “나는 당신이 성인이라는 말에, 뵙고자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당신을 자세히 보니 당신은 성인이 아니군요.” 사성기는 노자가 지식의 양이 엄청난데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자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사성기의 말에 노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사성기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 당신을 비방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네요.”   노자가 말했다. “어제 그대가 나를 소라고 불렀으면 나는 소일 것이고, 나를 말로 불렀다면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네. 내게 적어도 그런 모습이나 기질이 있으니까 남이 나를 그렇게 불렀을 텐데, 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禍)를 두 번 불러일으키는 게 아닐까?”   노자의 이 말을 듣고 무언가를 갑자기 깨우친 사성기가 기러기처럼 옆으로 걸어가서 노자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몸을 피했다(雁行避影). 그 후 ‘안행피영’은 배우는 사람이 스승에게 갖추어야 할 태도와 도리를 가리키는 말로 인용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오늘날에는 ‘안행피영’을 해드릴 수 있는 스승조차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기품 있는 스승도, 삼가는 제자도 어디론가 다 떠나버려서인가. 대신 인플루언서들이 유튜브에 나와 ‘구독과 좋아요’를 마구 외친다. 심지어 일선 학교에선 교사들에 대한 학부형의 폭언이 도를 넘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우리가 말하는 ‘학습(學習)’이란 단어에서 학(學)은 배움이고 습(習)은 실천이다. 학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학(學)의 장이라면, 가정과 사회는 그들의 습(習)을 챙겨야 한다.   군산으로 가는 도중 행담도 휴게소에서 같이 식사했던 사회복지사 권승희 박사가 생각난다. 권 박사는 비빔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설거지 봉사를 오래 했는데 숟가락에 눌어붙은 밥풀은 어지간해선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설거지하는 분들을 생각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지요.”   배려는 언어가 아니고 실천이다. 해가 지는 수평선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순조로운 비행을 위해 배려를 배우고(學) 실천하며(習) ‘구만리’ 먼 길을 안행하지 않는가.   곽정식 수필가 

    2024.03.05 00:46

  • [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기계보다 나은 삶이길 바라며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길을 걷다 보니 묵직한 짐을 지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스님들이 제법 눈에 띈다. 해제가 되어서 그런가 보다. 불교에서는 정월 보름이면 동안거 수행에 들어갔던 스님들이 마음공부를 마치고 산문 밖으로 나온다. 결코 짧지 않은 겨울철 석 달 동안 가부좌를 틀고 8시간 내지 10시간씩 앉아 있다가 이제야 겨우 제대로 다리를 푸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만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정월 보름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가 되면 산중의 모든 스님이 길 떠나기 전 법당 한자리에 모인다. 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큰스님의 법문을 들은 뒤 길을 나서고자 함이다.     ■  「 새로 시작하려 번뇌·미련 태워 챗봇, 사람 마음 헤아릴 수 없어 기계가 탐·진·치 수행할 수야 」    마음 읽기 정월 대보름날이면 환한 불빛과 함께 떠오르는 몇 가지 풍경들이 있다. 어릴 적 고향 마을 풍경이다. 나는 특히 쥐불놀이가 재밌었다. 쥐불놀이는 구경하는 것도 즐겁고, 돌리는 손맛도 무지 신난다. 논바닥에서 달집 태우는 모습도 뭔가 후련한 게 신기했다.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어딘가에 대고 빌던 어머니 모습도 정겹게 떠오른다. 아 참! 동무들과 함께 집집마다 찰밥 얻으러 다닌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정월 대보름의 휘영청 밝은 달빛과 논밭 복판에서 환하게 타들어가던 달집, 빙글빙글 돌아가는 쥐불놀이. 그러고 보면 정월 보름에는 늘 이렇게 빛과 함께였던 것 같다. 스님들이 동안거 석 달 동안 번뇌를 태우는 것처럼, 마을에서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뭔가를 태워 없앴다. 지금이야 산불이 위험하다며 금지령을 내렸지만, 어릴 적 어른들에게 여쭤보면 이렇게 불을 놓으며 뭔가를 태워 없애야만 한 해 농사도 잘되고 일도 잘 풀린다고 했다. 다시 시작하려면 뭐든 태워 없애야 하나 보다. 번뇌도 태우고 미련도 태우고. 지나간 못난 일들은 다 태우고, 잊고 새로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고향 마을 얘기를 꺼내서인가. 유년 시절의 마을 길을 떠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우리 마을은 어두운 골목길이라는 게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고향 집도 큰길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웃집들도 담 넘어 잘 넘겨다보였다. 꼬불거리는 논두렁 밭두렁도 훤히 보였다. 골목이 없진 않았을 텐데, 외진 골목을 경험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다. 어쩌면 겁이 너무 많아서 혼자 다니지 못한 탓에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러다 어떤 인연으로 큰 도시에 나가 살아보니 웬 길이 그리도 많은지, 차 다니는 무서운 큰길부터 뒷골목의 좁은 길, 막다른 길까지 참 많았다. 친척 집에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출가자들에게도 전 세계의 모든 정보가 이 작은 휴대전화 하나에 들어온다. 지인이나 친척 집 찾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원하는 맛집이나 핫플레이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올리는 정보 또한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따지고 보면 작은 휴대전화 하나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SNS를 통해 누구든지 자신을 알릴 수도 있다. 참선을 배울 수도 있고, 불교 교리를 배울 수도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전해지는 연결망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발전을 하다 하다 이젠 AI 시대라고 한다. 이웃 나라에선 목탁 치는 로봇도 나왔다. 어느 절에선 대종도 사람이 아닌 기계가 울린다. 이런 정도는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목탁과 대종 치는 일은 단순 작업군으로 분류되며, 사람의 질문에 최적의 답을 찾아주는 챗봇(챗 GPT)은 글을 쓰고 작곡을 하고 그림까지 그려주는 등 문학과 예술의 영역까지 진입하고 있다.   휴먼과 AI의 공존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종교, 철학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분석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데이비드 차머스는 2022년 ‘현실+이론’을 발표하면서 물리적 현실과 가상의 현실이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인생을 꿈으로 본 불교적 입장과도 연결된다.   25년 전,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하여 엄청난 흥행과 이야깃거리를 생산했던 SF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는 AI라는 개념이 전무했고, 자유로운 영화적 상상력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상상의 스토리가 이제는 현실이 되어간다. 정월 대보름의 정겨움과 소망도 디지털화된 세상에선 다른 형태로 바뀌겠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줄 수 없는 AI의 불완전은 어쩌면 수행자들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답을 제시하는 챗봇이라 해도 인간의 마음까지 헤아리기는 어려울 테고, 기계가 탐·진·치의 번뇌까지 수행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2024.02.28 00:27

  • [삶의 향기] 보편적 책임감에 대하여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산마루 그늘진 곳에 잔설이 한 무더기씩 남아있다. 지난가을 뒹굴던 낙엽들은 어느새 부토가 되어 양분이 되었고, 나뭇가지마다 새움이 텄다. 이른 봄이지만 남쪽에서는 벌써 청매화 꽃잎을 푸르른 찻잔에 띄우고 향기를 즐긴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남녘에 살 적에는 계절이 바뀌는 이 무렵이면 유난히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이 많아 조심스럽게 봄을 맞이하곤 했다.   지난 석 달, 안성 참선마을에서 첫 동안거를 났다.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부드럽고 안정된 내륙의 바람을 느낀다. 모르는 결에 새로운 환경에 깊이 스며들 듯 살았다. 적응 잘하는 성정을, 처한 여건에 잘 따른다고 해서 수연성(隨緣性)이라 한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렵다. 내가 만든 ‘나’를 키울수록 더 그렇다. 오직 수행으로 내가 만든 ‘나’를 줄이거나 없애야 인연에 따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  「 입적 세 스님과의 소중한 인연 동안거 기간 중 지낸 사십구재 마음이 평온하면 어디든 정토 」    삶의 향기 동안거 기간에 가깝게 지내던 스님이 세 분이나 원적(圓寂)에 들어 참선마을에서 사십구재를 지냈다. 첫 번째로 원적에 든 스님은 해남 미황사에 머물 때 인연이 된 팔십을 넘긴 분이셨다. 말년에는 수행 삼아 나무나 기왓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며 한가롭게 지냈다. 원적에 들기 전에 당신의 사십구재를 나에게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단다. 기억에조차 가물거리던 스님이었는데, 그분은 나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나 보다. 기억해주는 고마움에 월요일마다 정성스레 나물밥과 차 한 잔을 올리고 축원을 해드렸다.   두 번째는 중앙승가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제자 비구니 스님이다. 졸업을 앞두고 당한 갑작스러운 입적에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이나 가족들이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노을이 바라보이는 등성이 소나무 아래에 산골(散骨)을 하였다. 대웅전에 사십구일 동안 위패를 모셔 요절을 아쉬워하는 지인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했다.   세 번째는 지난 사십여 년 동안 아낌없이 격려해 주던 사숙 스님이다. 역사의식이 깊고, 종교인의 올바른 역할은 물론 사회적 고통에 대해 늘 연민하며 고통 해소를 위해 실천에 앞장섰던 분이다. 제주 법화사에 삼십 년 동안 머물며 아름다운 구품연지를 조성하였고, 법화원과 법화사를 창건한 신라 장보고 대사가 주도한 한중일 교류의 가치를 선양하였다. 병이 깊어서도 팔만대장경을 한글화하고, 많은 사람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불교성전 간행을 위해 고심하였다. 원적에 다다라서는 ‘빈도의 죽음에 대한 변’이라는 글을 남겼다. “출가 본사나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말라. 빈소도 마련하지 말라. 죽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나를 기리기 위해 돌멩이 한 개도 남기지 말라.”   각기 다른 유형의 세 분 수행자들의 원적을 사십구일 동안 온전히 느끼면서 지낸 동안거였다. 유유자적한 도인의 한가함,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인류에 대한 보편적 책임감을 실천에 옮겼던 삶을 어느 순간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각각의 인연을 존중하는 공부를 한 것이다.   “인간은 더 큰 보편적 책임감을 길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편적 책임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진정한 열쇠입니다. 그 책임은 세계평화, 자연자원의 공평한 사용을 위한 토대이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의 적절한 보호를 위한 토대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목적은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관용, 관대함,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인간의 자질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줄이고 타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계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   안거 중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허우성 교수가 번역해 출간한 책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을 들고 참선마을로 찾아왔다. 보편적 책임감과 자비와 세계평화 등 수록된 내용이 신기하게도 나의 생각과 맞닿아 있었다. 인류의 현재의 행복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인간이 보편적 책임감을 더 키워야 하고, 보편적 책임감이 인간생존의 진정한 열쇠라는 데에 공감했다.   동안거를 함께했던 수행자들이 모두 하산을 하였다. 도반들이 채웠던 공간들은 다시 고요와 평온으로 충만하다. 사실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면 산중에 살더라도 평온하지 않다. 해와 달, 구름이나 안개도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어떤 번거로움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분들의 삶은 산속이든 도시든 차별이 없다. 차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본래 성품이 드러난다. 그럴 때 비로소 보편적 책임감이 드러나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문득 한 수행자와 스승이 나눈 문답이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까?” “정토 아닌 곳이 있으면 어딘지 말해다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2024.02.27 00:28

  • [문태준의 마음 읽기] 리듬과 박동

    문태준 시인 시를 지으려면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는 경험은 나의 시심(詩心)을 일으켜 세우고 시심의 심장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몽골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몽골의 자연과 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게르, 야생마와 초원, 고비의 모래 언덕, 가족 공동체와 사랑 등을 노래한 시편이었다. 그들은 자연을 “어머니 자연”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감각과 깊은 사유에서 솟은 시편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말과 사막에 관한 표현은 모방할 수 없고, 지금껏 한 번도 이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처음의 것이었다.     ■  「 어머니 자연을 읊는 몽골 시편들 생활의 호흡과 생명의 밝은 광채 새봄에 틔울 마음의 맹아 생각해 」    김지윤 기자 가령 이스 돌람은 시 ‘경주마의 눈’에서 “수많은 경주마 앞에서/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며/ 선두로 달려오고 있는 경주마의 눈을 보라./ 광막한 지평선에/ 어둠이 서서히 열리고/ 먼 산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새벽의 금성이 그렇게 빛난다.”라고 썼다. 질주하고 있는 말의 눈빛과 새벽녘 금성이 내뿜는 광채를 연결시키면서 말이라는 하나의 생명 존재를 우주적 존재로 인식하는 큰 생각을 보여주었다. 몽골의 시인들이 자연을 통해 노래한 것은 인색함이라는 자물쇠가 없는 마음, 조금 더 자애로운 마음, 평온하고 순결하고 넓은 마음, 용기와 인내 등이었다.   시편들 가운데 더 많은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체 사롤보잉이 쓴 시구였다. 시 ‘만남’에서 거듭거듭 등장하는 시구였는데, 그것은 “생의 기운을 돌린/ 태양의 리듬/ 달의 박동이 있는/ 시간의 순환은/ 끝없는 세월의 연속”이라고 진술한 대목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왜 태양으로부터 리듬을 주목했고, 또 달로부터는 박동을 주목했을지 궁금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낮이라는 시간 동안에 반복되는 노동, 그 생활의 호흡을 ‘태양의 리듬’이라고 표현했고, 밤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과 그 음성을 박동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활의 되풀이되는 호흡과 생명의 밝은 빛이 생의 기운이라니. 아무튼 이 시구를 접한 이후로 때때로, 아니 그보다 훨씬 잦게, 마치 화두(話頭)처럼 ‘태양의 리듬’ 과 ‘달의 박동’이라는 두 개의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이 두 개의 말은 그리하여 요즘 내 사유의 첫머리요, 디딤돌이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에도 시간의 순환은 이어지고 있다. 겨울은 뒷등을 보이며 사라져가고, 저만치서 봄이 옷의 앞자락을 풀어헤치며 다가오고 있다. 봄을 맞이하는 때에 이른 것이다. 물론 한라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고, 두어 차례 추위가 앞으로도 몰려오겠지만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라봉 나무에는 이제 새가 먹을 열매만 남겨져 있다. 가끔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살펴보니 새가 달콤한 맛을 즐기고 다녀갔는지 과육이 움푹 패여 있다. 식구들이 먹을 한라봉 열매는 집 뒤꼍에 큰 항아리를 묻어, 거기에 저장해두었다.   그저께는 한라봉 나무를 전정했다. 나보다 훨씬 농사에 밝은 이웃집 사람이 전정을 막 끝냈기에, 전정의 시기를 재던 나는 서둘러 가지를 잘라냈다. 이웃집의 농사를 따라서 하긴 했지만, 이웃집 사람만큼 대범하진 못해서 나무에 햇살이 사방에서 골고루 들 수 있을 정도로만 곁가지를 쳤다. 고향집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한 해의 일을 끝낸 나무에는 비료를 넉넉히 줘야 한다고 하셔서 또 그 말씀에 따라 비 오는 날에 모자라지 않게 비료를 뿌려주었다.   서툴지만 삽목(揷木)도 했다. 삽목은 잘라낸 가지나 줄기를 흙에 꽂아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인데 개체를 늘리는 일인 셈이다. 삽목법도 이웃집 사람에게 배웠다. 내 집과 이웃집에는 같은 종류의 화초가 더러 있다. 이웃집 화단에 고운 꽃이 피면서 근사하게 자라는 화초가 있으면 그 화초의 이름을 물어 그때마다 심었던 탓에 이제 이웃집 화단과 내 집 화단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웃집 사람이 어느 날 내 집 화단을 보게 된다면 빙긋이 웃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웃집 사람이 알려준 대로 잘라낸 줄기마다 두 개의 순이 남도록 해서 부드러운 흙 속에 묻었고, 물속에 담가두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삽목한 가지로부터 뿌리가 나오고 두 개의 눈, 즉 두 개의 맹아(萌芽)에 의지해 화초는 자라날 것이다.   삽목을 하다 보니 잘라낸 가지에 남겨놓은 두 개의 눈이 화초의 생장에 있어 어떤 시초이자 단초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맞이할 새봄에는 어떤 마음에 근거해 살아가야 할까를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시인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자애롭고 평온하고 순결하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도 좋을 것이요, ‘태양의 리듬’과 ‘달의 박동’이라는 두 개의 말을 내면의 갈피에 넣고 살아도 좋을 테다.   문태준 시인 

    2024.02.21 00:35

  • [삶의 향기] 소는 누가 키우나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학부모 모임이 많다 보니 가는 곳마다 의대 증원이 화제다.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한 해에 5000명 이상이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 정원이 2000명 늘어나니 합격률도 당연히 높아진다. 유명 공대를 다니는 친구의 아들도 휴학을 생각하고 의대로 진로를 바꾼 수험생의 엄마도 있다. 수련의를 아들로 둔 지인은 동맹 휴학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고 선거용 선심성 발언이라는 의견도 있다. 저마다 다른 입장이지만 의대가 언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 걸까?     ■  「 대학 인기학과 정책 따라 달라져 AI 진료시대 의대 인기 식을수도   좋아서 해야 인생 후회하지 않아 」    김지윤 기자 대학의 인기학과는 국가 정책에 따라 수시로 변했다. 광업이 주요 산업이던 시대에 광산학과가 인기를 끌었고 정부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할 때는 화학공학과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될 때는 원자핵공학과가, 조선업이 활황을 이룰 때는 조선공학과가 대세였다. 전자산업이 뜰 때는 전국의 인재들이 전자공학과로 몰렸다. 국가가 주력하는 산업에 학부모와 수험생의 안테나가 같이 움직였다. 1970년대만 해도 전국 대학의 의예과 입시 순위는 최상위가 아니었고 치의예과는 공대보다 입학점수가 낮았다.   상위층 학생들이 의대에 몰리긴 했지만, 입학점수가 훅 높아진 것은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부터로 추산된다. 평생직장으로 알았던 기업이 도산하고 사무직은 물론 생산직까지 구조조정으로 밀려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위기의식이 팽배해졌다. 내 자식만큼은 부모가 겪은 위기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인식은 교육열로 이어졌다. 사회적 대우와 고수익이 보장되는 가장 안정된 직업으로 의사가 꼽히면서 의예과는 최상위 성적의 수험생들이 지원하는 최고의 학과가 되었다. 의학전문대학원까지 설립되면서 타 전공자가 의사가 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인구는 감소했지만, 의사는 계속 증가해서 2024년 현재 12만 명에 육박한다.   그러나 지방은 여전히 의사가 부족해서 환자가 응급실을 전전하고 산모가 출산 병원을 찾아 헤맨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된다.   지난 정부는 의대 증원을 언급했다가 반발에 부딪히자 백지로 돌렸다. 그때는 400명 선이었지만 현 정부는 2000명 증원을 발표하면서 “벼랑 끝에 서 있는 필수 의료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골든 타임”이란 절박한 표현까지 썼다. 필수 의료는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와 같은 생명과 직결되는 진료과목을 말한다. 일은 힘들고 건강보험 수가가 낮아 전공의들이 기피하는 과목이라고 한다.   지난해 지방 의료원에서 연봉 4억원을 제시해도 지원자가 없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의사가 지방에 가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수익 때문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도시와 지방의 불균형은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방의 의료 부족을 의사들의 지방 의무 복무로 채운다면 진료의 질은 어떻게 될지 의구심도 든다. 도시라고 해서 모두 양질의 진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 민간 의료자본가가 지은 병원에서 의사에게 진료받을 때 짧은 면담으로 끝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상 대형 병원일수록 양상이 심했던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의료수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일수록 국민이 병원에 자주 가고, 의사도 많은 환자를 진료한다고 한다.   의사 수의 정원 문제는 정부와 의사단체가 협상할 문제지만 일각에서 선거를 앞두고 발표한 파격적인 숫자의 의대 증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국민과 의사를 ‘갈라치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걱정되는 건 젊은 층의 희생과 의료대란이다.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해묵은 문제는 폭탄 돌리기처럼 보였다. 전쟁은 늙은이가 일으키고 전투는 젊은이가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집단행동을 불사하겠다는 의대생들을 만류하면서 의대 교수들이 직접 비대위를 결성하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지금 의사 증원이 심각하지만 머지않아 과거의 일로 회고하게 될 것 같다. 인구 감소 속도가 빨라지면서 한때 100만 명을 상회하던 수능생은 올해 30만 명 숫자로 내려앉았다. 2050년에는 10만 명 숫자로 주저앉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의사 수도 감축해야 할 상황이 빨리 올 것 같다. 인구는 감소하고 기술은 발전해서 AI가 진료하는 시대가 목전에 도래하고 있다. 의대가 인기를 누리던 시절을 옛이야기처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의 인기학과가 그렇게 명멸했듯이 말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지만 나는 의사라고 하면 『개선문』의 라비크 같은 외과 의사를 떠올리는 아날로그 세대다.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 방법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모임에서 웃으며 한 말이다. 너도나도 의대를 간다면 대체 소는 누가 키우는가?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2024.02.20 00:25

  • [최은미의 마음 읽기] 5시부터 7시까지의 당신

    최은미 소설가 지인들과 신년 모임을 하던 자리에서 길흉화복을 점쳐준다는 앱을 열고 올해의 운세를 보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시기엔 불안도를 자극하거나 정신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차단하는 편인데 그날은 왠지 내키지 않았는데도 토정비결 앱을 연 후배한테 내 생년월일시를 불러주고 말았다. 2024년의 내 운세엔 안 좋은 말들이 고루 적혀 있었다. 질병과 구설수, 가까운 사람과의 반목과 손절 등등.   부정적인 말들을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재미로 생각하라거나 조심하며 지내면 된다는 말이 그다지 와 닿지 않게 된다. 여기서 어떻게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 때가 많고 일상과 일생을 흔드는 일들은 인과(因果)로 반듯하게 설명될 수 없는 채로 찾아올 때가 대부분이므로.     ■  「 길흉화복 앱에서 올해 운세 봐 말의 영향권서 벗어날 방법 없어 한달이든 한해든 통과할 수밖에 」    김지윤 기자 내게 수신된 말의 영향권에서 홀연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 달이든 한 해든 그 말이 걸어놓은 시간을 그저 고스란히 통과하는 수밖에는 없다. 아무런 불운 없이 그 기간이 무사히 지나갈 가능성과 내 취약한 장기의 세포 변화로 인해, 사회적 자아의 타격으로 인해, 잃어버린 사람으로 인해 인생이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모두 안은 채.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40대 중반의 연극과 교수인 주희가 의사한테 조직 검사를 권유받는 것에서 시작된다. 주희의 유방 초음파 결과를 보면서 의사는 이런 경우 열명 중 한 명 꼴은 암이라고 말한다. 아홉명은 암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말한다. 그때부터 주희는 절망할 수만도 없고 낙관할 수만도 없는 어떤 시간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는 병원에서 나와 연구실로 돌아간 주희의 5시부터 7시까지를,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가능성이 열리게 된 주희의 두 시간을 다룬다.   주희는 그 두 시간 동안 연구실로 찾아온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복도에서 만난 동료 교수의 푸념을 한참 동안 듣기도 한다. 딸아이를 봐주고 있는 친정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암의 가족력을 묻기도 하고 성적 이의제기를 하러 온 학생을 설득하며 다음에 보면 인사하자고도 말한다. 7시가 다 되어갈 무렵엔 건물 복도를 헤매다 길을 물어온 배달 라이더를 만난다.   자판기와 구름다리를 어떻게 지나 찾아가야 하는지 라이더에게 길을 말해주는 주희와 주희의 설명대로 자판기를 지나 뛰며 길을 찾는 라이더의 모습은 이 두 시간 동안의 만남 중 가장 잔상이 오래 남는 만남이다. 라이더가 숨을 몰아쉬며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문을 연 스튜디오는 그리 오래지 않을 미래의 어느 장소로 연결이 되고, 그곳엔 이전의 어느 날 특정 시간대에 주희가 만났던 이들이 모두 모여 있다. 그 장면에 이르러서야 영화는 5시부터 7시까지의 시간이 주희가 겪어낸 시간일 뿐만 아니라 주희를 만난 이들이 주희를 기억하는 시간일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어떤 시간이 기억하는 사람의 시간이 될 때 무엇이 동반되는 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마지막 인사인 줄도 모른 채로 무심한 인사를 건넸던 그때로, 했어야 좋았지만 하지 못한 말들 사이로, 다시 나눌 길이 없는 차 한 잔의 시간 속으로, 누군가는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당신이 그 선택을 하기 전으로, 누군가 개입할 수도 있었을 상황 속으로, 내가 그 말을 뱉기 전으로, 너를 잃기 전으로, 이제 그만 기다리겠다는 말을 듣기 전으로, 그 전으로, 다시 그 전으로, 계속 되돌아가고, 반복해 겪고,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상대와의 시간을 재구성하고 기억의 틀을 만든다. 우리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를 만났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자신한테 가장 중요한 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제자를 주희는 다만 안아주는 사람이다. 가장 어둡고 힘들 때 자신이 가장 잘 보인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이고 사실은 너무 무섭다면서 엄마한테 안겨 울고 싶은 사람이다. 제자가 들고 온 쿠키를 너무도 맛있게 먹는 사람이고 배달 라이더가 길을 잘 찾을지 걱정하며 오래도록 복도 끝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주희의 모습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얘기하며 눈을 맞추고 있을 때의 주희가 아니다. 잠깐씩 혼자 남았을 때, 상대와 시선이 비끼던 찰나의 순간에 김주령 배우의 얼굴에 드러나던 주희의 짙은 피로감이다. 사십 몇 해를 묵어야만 가능한 농도의 피로감. 젊지도 않지만 늙지도 않은 자이기에 더 피해갈 수 없는 피로감. 애증과 연민과 우정과 체념의 시간을 끌어안은 채로도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는 자의 피로감. 나는 어쩐지 그런 지친 눈빛을 한 자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최은미 소설가 

    2024.02.14 00:28

  • [삶의 향기] 천년을 빌려준다면

    황주리 화가 설날 어머니가 보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같이 보다가 이런 노랫말이 귀에 꽂혔다. “만약에 하늘이 천년을 빌려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긴 삶의 길이가 천년인 모양이다. 학 천 마리를 접어 소원을 빌고, 천년 고찰을 찾아가고, 천년초를 먹고, 천년 지기와 함께하는, 천년이라는 삶의 길이를 생각한다. 천년이라 한들 급류에 휩쓸려 가는 기분인, 이런 속도로는 그것도 금방 갈 것만 같다.     ■  「 삶도 역사도 되풀이되는 것 천년 지나도 목적지 도달못해 이데올로기 전쟁은 부질없어 」    그림=황주리 누군가와 가깝다는 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가까웠던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는 건 시간이 아까워진 탓이다. 쓸데없는 인연들과 낭비한 시간들이 아까워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교과목에 시간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시간이 낭비인지 아닌지 구분할 지혜는 그 많은 시간들을 다 낭비한 뒤에야 얻게 된다.   황혼 이혼을 하는 사람들의 모래성 같은 시간을 생각한다. 오래된 영화 ‘중경삼림’에서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만년으로 하자.’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어차피 시간은 상징이다. 우리는 그저 유효기간만 알고 살면 된다. 하지만 그걸 알고 사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갖가지 색깔의 약병들과 식료품들과 관계의 유효기간, 권력의 유효기간, 우정과 사랑의 유효기간, 염색의 유효기간, 목숨의 유효기간. 유효기간을 제대로 알고 떠난 지혜로운 인간은 역사상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던 나폴레옹이나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반된 말이나 사실 같은 말이다.   나는 인상 깊었던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걸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거의 기억나지 않는 장면들의 신선함에 놀란다. 어쩌면 같은 삶을 두 번 살아봐도 이런 기분일지 모른다. 거의 기억나지 않아 처음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내용과 결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저 따뜻했다거나 풍광이 아름답거나 배우의 표정과 대사가 인상적이었다는 희미한 분위기만 기억할 뿐이다.   독서도 여행도 결혼도 이혼도 다 그럴지 모른다, 삶과 죽음까지도. 사실 개인적으로도 태어났기 때문에 계속 사는 것이고, 그림을 이미 너무 많이 그려서 계속 그리는 거다. 우리 모두의 삶이, 되풀이되는 인간의 역사가, 산 위로 돌을 밀어 올렸다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끝없는 ‘시지프스의 신화’가 아닐 수 없다.   무슨 영화에서인가 졸다가 갑자기 깬 적이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고 살아있는 게 유감이다.” 바로 이 대사였던 것 같다.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살아있는 게 유감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얼마나 많은 세상의 영웅들이 이런 고독을 감당했을까? 어릴 적 나는 늘 전쟁이 무서웠다. 전쟁 때 폭격을 당해 아기인 줄 알고 베개를 안고 뛰쳐나온 여인의 이야기를 읽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던 여섯 살 어린 동생이 김대중 후보가 선거에 나온 해에 벽에 붙은 김대중 후보의 포스터의 얼굴의 입을 지우거나 눈동자를 지우고 다녔다.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하면 네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단다.” 미래에는 도대체 누가 대통령이 되고 싶을 것인가? 우리들의 대통령은 다 훌륭했고, 무언가는 잘못했다. 그 무거운 책임을 지고 떠난 그분들께 감사한다. 천년이 지나도 우리는 영원히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완벽한 세상은 없고 이것을 얻으면 저것을 잃는 게 게임의 법칙이니까.   문득 어제 본 영화 ‘건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독백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렇게 외롭게 서 있는 것일까?” 천년에 비하면 너무 짧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 어릴 적 우표 수집광이던 나는 우표를 새로 수집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표 수집 앨범에서 내가 태어나기 5년 전인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기념 우표를 찾았다. 오래된 우표를 보면서 왜 우리는 대한민국을 누구보다 사랑하신 그분을 역사 속의 희미한 그림자로 남겨두었을까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부질없는 이데올로기 전쟁 중이다. 자본의 이데올로기만 통용되는, 이 돈밖에 모르는 세상에, 진짜 공산주의자는 다 죽고 없고 껍데기만 남은 세상에. 백 년을 감당하기도 힘든 내게 천년을 빌려준다면, 나는 너무 벅차 지구 밖으로 도망갈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누군가가 “반장이 너무 무능합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 잠 못 이루던 그날처럼.   황주리 화가 

    2024.02.13 00:33

  • [이은혜의 마음 읽기] 실시간 사회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SNS 일상사에서 우리는 타인보다 자신을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나의 반응, 나의 성정이 바뀌고 때로 망가지기도 하는 것을 수시로, 그리고 긴 기간에 걸쳐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좋아요’와 ‘슬퍼요’를 누르는 나의 시간 간격을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있다면 나를 사이코패스라고 여기지 않을까 두려웠다. 1초 전에 누군가의 부음을 접하고 우는 표정을 지었던 나는 다른 사람이 올린 여행 사진에 열광한다. 이 틈 사이에서 오랫동안 정신이 분열될 것 같았던 나는 이제는 분열의 감각마저 사라지는 경지에 들어섰다. 아무도 나의 실시간 반응을 지켜보지 않으니 나도 나 자신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  「 일상화된 SNS, 성정 망가지고 짧고 얕은 감정 반복에 길들어 단톡방 무반응, 거부로도 여겨 」    마음 읽기 일희일비(一喜一悲)의 감정이 일상을 지배한다. 뇌는 초 단위로 양극단을 널뛰면서 통합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다. 짧은 시간에 서로 먼 감정 사이를 광활하게 오가는 것은 얕게 부유하는 것과 같다. 표현할 수 있는 정서는 희로애락의 이모티콘으로 표준화되어 있다. 표준화는 생각의 회로를 멈춰 세운다.   손가락은 바쁘다. 반면 머리는 바쁘기도 하고 한가하기도 하다(두 감정을 오가는 자신의 분열을 붙잡아두려고 바쁘나 사실 아무 생각이 없기도 하다). 답글을 달지만 이 행위에는 약간 꺼림칙함이 있다. 진심을 다한다 해도 그런 감정 소모에는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으로 충분하기에, 이 시간 쓰기의 행동은 내가 지금 거짓에 속해 있다고 말해준다.   우리는 동어반복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겹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작가가 같은 동사를 계속 반복한다면 더 나은 어휘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가 의문을 품을 것이다. 번역가 류진오는 작가가 수사적 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쓴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어반복에 멀미가 난다고 호소한다. 그는 어떤 책을 번역하던 중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반복을 피하고 싶어 웁니다. 울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눈물바다가 됩니다. 훌쩍입니다.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콧등이 시큰거립니다. 대성통곡합니다. 오열합니다. 영혼의 둑이 터지면서 그간 차마 소화하지 못했던 것들을 눈물과 함께 방류합니다.” 번역가는 원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상투적 어휘를 못마땅해하면서 살짝 표현을 가공하기도 한다.   SNS는 반복이다. 시시각각 서사의 속내는 변하지만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짧고도 얕은 감정의 반복이다. 이 반복을 스스로 애석해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순응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 점점 장사꾼의 감정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무엇을 팔진 않지만 손님 한 명이 가고 나면 곧이어 다음 손님을 받는 식이다. 상행위에 길들여진 사람은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거의 품지 않는다. 시간 쓰기와 정서 쓰기에 대해 개인에게 주어진 자율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부고가 올라오는 페이스북을 보자. 비극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다 보면 평정심을 지키고 싶다. 우리는 덮어씌울 만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것은 빠르고 직접적인 감각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맛있는 음식이나 술이 위로가 된다. 즉 이성으로 곱씹어야 할 것이 감각으로 희석된다. 이처럼 사건 경험이나 목격의 간격을 짧게 유지하다 보면 폐기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난다. 바꿔 말해 쓰레기가 되는 감정들이다.   최근 나는 친구 동생의 부음을 들었다. SNS가 아니고 장례가 끝난 후 직접 만나서 들었다. 2시간 동안 대화하며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다가 웃었다. 일희일비이지만 이건 온라인상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 죽음은 슬프다. 하지만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일상의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든다. 잠깐 잊고 우리는 웃는다. 다시 화제의 중심이 슬픔 쪽으로 이끌리고 상대의 동요하는 정서, 촉촉한 눈매가 나에게 스며든다. 나도 한마음이 되어 운다. 그날 감정은 여러 번 출렁였지만, 그래도 최소 2시간 동안은 출렁임이 지속되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둘이 만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평상시의 회복을 49재 이후로 미루었다.   SNS는 아니지만 단톡방 역시 종종 동감을 강요한다. 우리는 무반응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거부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멤버가 소수로 한정된 단톡방에서는 각자가 반응해야 할 몫이 n분의 1로 정해져 있다. 몫도 몫이지만 반응의 속도 역시 중요하다. 매번 뒷북을 칠 순 없기에 답글을 적지만, 만약 침체된 상태라면 쓰는 자아와 나는 분열된다. 이런 분열이 여러 개의 단톡방 사이에서 다시 반복된다. 정서적 교감으로 감당할 수 있는 단톡방이 몇 개인지는 모르나, 최근 제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방이 개설되면 기존 방 하나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그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리면 감정적 반응과 추측을 짧고 격렬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4.02.07 00:29